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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문학 칼럼] 팔만대장경과 AI 알고리즘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일찍이 세계 수준의 IT 인프라와 반도체 경쟁력을 바탕으로 ‘AI 3대 강국(G3)’ 도약을 국가적 비전으로 선포했다. 정부는 생성형 AI를 단순한 기술 도구가 아닌, 국가 경쟁력의 핵심 동력이자 민생 혁신의...

[인문학 칼럼] 팔만대장경과 AI 알고리즘 사이에서

인공지능 기술 독점은 소수 특권체제로 회귀

보편·공정원칙 없으면 현대판 무신정변 우려

정은정 부경역사연구소 연구원

바야흐로 AI의 시대다. 대한민국은 일찍이 세계 수준의 IT 인프라와 반도체 경쟁력을 바탕으로 ‘AI 3대 강국(G3)’ 도약을 국가적 비전으로 선포했다. 정부는 생성형 AI를 단순한 기술 도구가 아닌, 국가 경쟁력의 핵심 동력이자 민생 혁신의 열쇠로 정의한다. 이에 대대적인 투자와 정책적 지원을 쏟고 있다. 초거대 AI 모델을 보유한 몇 안 되는 국가로서, 한국은 지금 디지털 영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적 행보는 고무적이다. 생성형 AI는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교육·의료·공공 서비스 문턱을 낮추는 등 막대한 사회적 이득을 약속한다. 하지만 찬란한 비전 이면에는 날카로운 의문이 숨겨져 있다. 거대한 기술적 도약이 과연 사회 구성원 모두를 위한 진보인가, 새로운 방식의 배제를 낳는 장벽인가.

850여 년 전 고려의 역사는 AI 강국을 꿈꾸는 지금, 차가운 경고를 던진다. 1170년 고려 사회를 뒤흔든 무신정변은 단순한 우발적 사고가 아니었다. 수십 년간 쌓인 ‘지식 엘리트(문신)’와 ‘실무 전문가(무신)’ 사이의 극심한 비대칭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무신정변의 결정적 도화선이 된 ‘보현원 사건’은 상징적이다. 젊은 문신 한뢰가 환갑이 넘은 노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렸을 때, 임금과 문신들은 파안대소하며 즐거워했다. 이소응의 뺨을 때린 한뢰의 손바닥은 실무를 경시하고 지식 권력에 취한 오만이었다. 이 수모를 기점으로 정중부 이의방의 무인들은 칼을 뽑아 보현원을 피로 물들였다. 결국 차별과 모멸은 칼날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이후 100년간 이어진 무신 정권은 지식과 제도의 균형이 붕괴할 때 사회가 치러야 할 혹독한 대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정변 이후 고려는 몽골 침입이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았다. 위기 속 고려는 다시금 통합을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곧 팔만대장경의 조성이다. 팔만대장경은 위기 극복을 위한 발명이자 국가 역량을 총동원한 가혹한 통치 행위이기도 하다. 8만여 장의 목판에 새겨진 5200만 자의 기록은 단순한 신앙을 넘어선 거대한 국가 공공 프로젝트의 산물이었다. 대장경 판각은 21세기 AI의 ‘데이터 정제’ 과정과 흡사하다. 흩어진 경전들을 대조하여 오탈자를 바로잡는 교감 작업을 통해 지식의 정본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기술, 데이터 축적의 이면에는 백성들의 눈물이 배어 있었다. 전란으로 삶의 터전이 파괴된 상황에서 백성은 나무를 베고 나르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다. 국가 비전을 위해 개인의 희생이 담보된 구조였다.

AI는 어쩌면 ‘현대판 대장경’이다.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패턴을 형성하고, 검색 순위와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사고 경로를 은밀히 규정한다. 고려가 목판으로 지식을 복제했다면, 알고리즘으로 지식을 증폭하고 있다. 문제는 이 ‘알고리즘 권력’이 누구의 손에 있느냐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AI 비전이 성공하려면 몇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소수 엘리트와 거대 기업이 지식을 사유화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 AI가 기획과 창작 영역까지 대체하는 현재, 고도의 디지털 리터러시를 갖춘 집단은 권력을 강화할 것이다. 반면 기술 접근성에서 밀려난 이들은 ‘디지털 주변부’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게다가 AI를 다루는 소수 엘리트가 현장 노동자와 비숙련자의 가치를 그저 ‘학습용 데이터 단위’로만 취급한다면, 제2의 보현원 사건은 소리 없이 재연될 수 있다.

팔만대장경이 수백 년을 견딘 비결은 장경판전의 정교한 설계, 즉 ‘보존을 위한 구조적 배려’ 덕분이었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기술의 성능만으로는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정부가 제시한 AI 강국 비전은 화려한 기술적 성취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다. AI를 전취하는 이익을 어떻게 나누고, 누구에게 접근권을 부여할 것인가. 이 시점 분배의 철학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구조적 배제는 균열을 낳고, 균열은 시스템 전체를 무너뜨린다. 두려운 건 AI가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가 아니다. 기술 격차가 신분 격차로 고정되면 지식과 기술을 독점한 새로운 엘리트 중심 체제로 회귀할 위험이 크다. 특히 교육과 기술 접근성을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하지 못하면, 알고리즘은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될 것이다.

고려는 위기 속에서 대장경을 새기며 공동체의 통합을 꿈꿨다. 이면에는 산벚나무를 베고 나르고 소금에 절이며 글자를 새기던 백성들의 눈물이 스며 있다. 대한민국은 AI라는 새로운 경전을 쓰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AI 강국, 휴머노이드 로봇의 노동 현장 투입은 화려한 기술적 성취만을 담보하진 않는다. AI 비전은 보편적 접근권과 공정한 분배의 원칙을 담아야 한다. AI 기술은 모두의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특권의 서사인가. 그 해답에 따라 무신정변은 역사책 속의 박제된 사건으로 남을 수도, 혹은 우리가 마주할 미래의 지침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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