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현
계명대동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얼마전 교사들이 학교 수학여행 인솔을 기피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모든 법적·경제적 책임을 교사 개인에게 지우는 과도한 부담 때문이다. 의사들은 이 현상을 보며 가슴 서늘한 기시감을 느꼈다. 대한민국 의료의 심장이자 대동맥 역할을 해온 '필수 의료 수련 기피' 현상이 교사들의 수학여행 인솔 기피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명감이 냉소로 변하고 시스템이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릴 때, 그 파국적인 피해는 결국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왔던 전공의(레지던트) 수련 제도는 본래 미국식 실용주의의 산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의학이 급격히 전문화되자, 연구와 진료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고도의 전문의를 양성하려 고안한 것이었다. 반면 유럽은 연구는 대학이, 진료는 병원이 분담하는 이원적 구조를 취하며 각자의 길을 걸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수련 제도가 고정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사회적 필요에 따라 그 형태는 끊임없이 진화해 온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 엔진은 시대에 맞게 진화하기는 커녕, 사법적 위험이라는 거대한 암초에 걸려 완전히 멈춰 설 위기에 처해 있다.
대한민국 의료의 가장 큰 구조적 모순은 환자를 적절한 의료기관으로 안내할 '제대로 된 길잡이'가 없다는 점이다. 미국, 유럽, 캐나다 등 선진국에서는 가정의학과나 일반 내과가 일차 진료의 중추(게이트키퍼)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이 환자의 중증도를 판단하고 의료 자원을 적절히 배분한다. 반면 우리는 환자에게 '무한 선택의 자유'를 부여했다. 누구나 감기 증상만으로도 서울의 대형 3차 병원으로 달려갈 수 있는 구조다. 환자는 스스로 진단을 내리고 유명 교수를 찾아 헤매는 '의료 쇼핑'에 나서고, 의료 전달체계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이한 왜곡이 발생한다. 의대 졸업생의 95%가 고된 수련을 거쳐 전문의가 되지만, 필수 의료를 비롯한 상당수가 전공을 포기하고 피부·비만 치료 등 형사 처벌 위험이 없는 '생존형 비보험 진료'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과거의 젊은 의사들이 주 100시간에 달하는 가혹한 수련을 견뎌낸 이유는 명확하다. 전문의 자격이 가져다주는 합당한 경제적 보상, 사회적 평판,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자율성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저수가 정책과 고의가 없는 의료 사고조차 형사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공포가 일상이 되었다. 이제 전문의 자격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다. 여기에 최근 의대 정원 사태로 촉발된 갈등은 전공의들의 직업적 가치관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제 젊은 의사들은 사명감이라는 명분 대신 워라밸과 개인의 생존을 냉정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가시밭길을 견딜 만한 명분도, 실리도 주지 않으면서 사명감이 부족하다고 비난할 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의사도 인간이다. 더 나은 수입과 좋은 평판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본능이다. 역설적으로 이 세속적인 욕망이 의학 발전과 환자에 대한 헌신을 이끌어온 보이지 않는 엔진이었다. 사회주의적 잣대로 이 엔진을 강제로 끄려 한다면 의료의 질은 추락할 수밖에 없다. 의사를 시스템의 소모품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결국 환자의 치명적인 피해로 귀결된다. 난치병 환자 곁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 것보다 미용 시술을 배우는 것이 더 안전하고 이득인 사회에서, 누가 고난도의 생명 구호 의술에 인생을 걸겠는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위기의 바탕에 우리 사회 특유의 징벌적 책임 추궁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에서 의료사고로 고발당하는 의사는 하루 평균 2건에 달한다. 반면 의료 선진국인 영국은 1년에 그 정도에 불과하다. 영국이라고 왜 의료사고가 없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기보다, 시스템을 개선해 비슷한 사고를 어떻게 예방할지, 어떻게 해야 그 죽음을 값진 교훈으로 남길지를 더 고민한다.
예기치 못한 비극 앞에서 서구 사회는 인간의 유한함을 인정하고 체념할 줄 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는 지진이나 어쩔 수 없는 의료적 한계 앞에서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관조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집단적 심리는 철저히 샤머니즘적 억울함과 풀이에 갇혀 있다. 불행과 비극이 발생하면 반드시 누군가의 탓으로 돌려야만 직성이 풀린다. 진상 규명이라는 명분은 결국 책임질 놈을 붙들어 오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러한 샤머니즘적 사회에서는 인간이 죽을 존재라는 절절한 한계 인식이 없다. 팔구십 노인이 천수를 다해 병원에서 숨을 거두어도, 그것은 인간의 유한함 때문이 아니라 치료를 잘못한 의사의 탓이 된다.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의사를 고발하고 법정에 세워야만 굿판이 끝난다. 심지어 자식이 술을 먹고 발을 헛디뎌 사고를 당해도 같이 술을 마신 친구의 탓을 하고, 고의성을 의심해야만 억울함이 가시는 사회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라는 이성적 수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불행의 원인을 의사 개인의 형사 책임으로 돌리는 사법 만능주의는 결국 대한민국 필수 의료의 붕괴를 재촉하고 있다. 결과의 책임을 의사에게 묻는 사법 위험 속에서, 대한민국 의료를 지탱하던 수련 제도의 엔진은 급격히 식어가고 있다. 한번 꺼진 엔진을 다시 켜는 데는 몇 배의 시간과 사회적 비용이 필요할지 모른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전공의 수련 기피와 필수 의료의 붕괴는, 대한민국 복지 시스템 전체가 회복하기 어려운 긴 추락을 시작했다는 엄중한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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