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과 페어링 좋은 세미드라이한 주정강화주
‘코리안민트’ 18개월 양조 체험기도 함께 출판
지난 7일 서울 방배동 한국가양주연구소에서 열린 《술 이름은 코리안민트》 출판기념회에서 홍은택 작가가 독자에게 사인을 건네고 있다. 홍 작가는 이날 18개월간의 양조 여정을 공유하며 전통주의 현대화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초가속의 세상에서 더는 시간에 쫓기며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국내 최대 IT 플랫폼 기업 카카오를 이끌었던 홍은택 전 대표(이하 작가)가 술을 빚었다. 종이신문에서 온라인, 모바일에 이르기까지 그는 늘 변화의 최전선에서 속도전을 펼쳐왔다. 그런 그가 돌연 시간과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기다림’의 세계로 발을 디뎠다. 최근 그는 경기도 여주의 양조장 술아원과 협업해 자신의 레시피로 만든 과하주 ‘코리안민트’를 출시하고, 18개월간의 양조 탐험기를 담은 책 《술 이름은 코리안민트》를 펴냈다.
인터뷰를 위해 서울 삼성역 인근의 사무실에서 홍은택 작가를 지난주 만났다. 훤칠한 키에 선비 같은 인상이다. 풍류를 즐기며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그려지지만, 직접 땀 흘리며 술 빚는 모습은 쉽게 연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뷰 도중 서애 류성룡과 《수운잡방》의 저자 김유 이야기가 나왔을 때, 두 세계는 비로소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선비들이 주방문(酒方文)을 쓰던 것처럼, 인공지능 시대의 길목에서 이 지식인은 레시피를 기록하고 술을 빚었다. 종이 매체를 떠난 뒤 미국을, 네이버를 떠난 뒤 중국을 자전거로 가로질렀던 사람이 이번엔 술독 앞에 앉은 것이다.
양조 세계로의 입문
주변에선 한결같이 “굳이, 왜”라고 물어왔다. 그의 답은 명료했다. 술은 사람들 사이를 이어주고 문화와 전통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술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게 무척 자연스러운 일인데, 지금 우리 사회는 그게 부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더불어 술 빚는 과정은 모바일 세상과 달리 손에 잡히는 결과물을 남긴다는 점도 그를 이끌었다.
그가 선택한 술은 과하주다. 여름(夏)을 넘기는(過) 술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발효 중간에 증류주를 넣어 발효를 중단시킨 주정강화주다. 셰리·포트 와인과 같은 개념의 술이다. 홍 작가는 이 술에서 세계화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한식과 잘 어울리고 장기 유통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한국 술의 미래를 엿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싸고 빠르게’ 취하는 술 문화에 머물러 있었던 만큼, “음식과 함께 음미하는 문화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럴 수 있는 술이 많아져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전통 과하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코리안민트’의 제작과정을 설명하는 인포그래픽. 제작은 ‘구글 플로우’.
100번의 실험, 녹두와 방앗잎의 발견
‘코리안민트’가 다른 과하주와 구별되는 지점은 녹두와 방앗잎이라는 두 부재료다. 이 발견에 이르기까지 홍 작가는 100여 번 이상 과하주를 빚었다. 좁쌀과 차조, 녹두, 보리 등 재료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양조 실험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두 재료가 홍 작가가 원하는 풍미를 만들어낸 것이다.
녹두를 부재료로 점지한 계기는 ‘백수환동곡’이라는 누룩이었다. 밀에 녹두를 함께 넣어 만든 이 누룩은 특별한 향미를 만들어주었다. 녹두 특유의 풋사과 향과 갓 벤 잔디에서 나오는 청량함은 찹쌀만 쓸 때 생기는 무거운 단맛도 잡아줬다. 게다가 녹두는 산미까지 보태주니 홍 작가가 찾던 최적의 부재료인 셈이었다. 단맛이 강조된 술은 식중주로 사용하기 힘들다. 음식과의 조화가 어렵기 때문이다. 홍 작가는 이 점에 초점을 맞추고 부재료를 찾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 향기를 술덧에 담는 방식이었다. 백수환동곡은 만들기 힘든 누룩이다. 따라서 고난도의 누룩을 쓰지 않고 원하는 향기를 낼 방법이 필요했다. 홍 작가는 녹두를 누룩이 아니라 쌀과 함께 고두밥을 짓는 방법을 선택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운 제조법으로, 사실상 상업 양조 최초의 시도다.
방앗잎은 우연히 선물처럼 찾아온 부재료였다. 홉과 다양한 천연 부재료로 술을 빚었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2%가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어느 날 서울의 한식 전문 주점 ‘디히랑’에서 ‘방앗잎전’을 맛보게 되었다. 이것이 상상력의 불씨가 돼 주었다. 방앗잎은 익숙하면서도 특유의 향미를 가진다. 민트 계열의 향이면서, 우리 정서에 닿아 있는 향기였다.
게다가 방앗잎의 영문명이 ‘코리안민트’라는 점은 세계 시장을 겨냥한 술 이름으로도 더할 나위 없었다. 한국의 허브를 통해 한식과 페어링할 수 있는 술을 만든다는 이야기까지 얹을 수 있는 1석2조의 부재료인 셈이다. 이렇게 재료를 찾는 긴 여정은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맛의 균형이었다. 과하주는 증류주를 붓는 시점에 따라 맛이 달리 나온다. 조선시대 조리서에선 보통 3~4일 정도에 소주를 넣는 방식을 적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맛의 과하주 제조법이다. 일부 약용 부재료를 넣은 과하주는 7일 정도에 넣는 기록도 있다. 이때 소주를 넣으면 술맛은 드라이하게 나온다.
홍 작가는 수십 번의 실험 끝에 5일차를 소주 투입 시점으로 결정한다. 녹두와 방앗잎의 조합 뒤에 단맛을 감추고 감칠맛을 높일 수 있는 지점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소주도 다양하게 실험했다. 쌀·밀·고구마 등 여러 증류 소주를 사용했지만, 결론은 맛에 중립적인 ‘주정’을 선택했다. “이미 술덧에서 향미의 구조가 완성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향을 해치지 않는 무색무취한 주정이 과하주를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됐다”는 것이 홍 작가의 설명이다.
홍은택 작가가 18개월간의 양조 기록을 담아 펴낸 책 《술 이름은 코리안민트》와 그의 제조법으로 ‘술아원’에서 빚은 과하주 ‘코리안민트’. 녹두와 방앗잎을 사용해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전통 주정강화주다.
술 이름은 코리안민트
책에는 18개월간의 양조 탐험기와 함께 술 빚는 제조법이 빠짐없이 수록됐다. 심지어 공식 판매에 들어간 코리안민트의 레시피까지 공개했다. “레시피는 정적인 정보예요. 개발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면 사람들이 더 실감 나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제조사 등 여러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실었습니다.”
홍 작가가 제조법을 공개했듯, 크래프트 맥주 세계에서 레시피는 비밀이 아니다. 같은 제조법이라도 빚는 사람, 공간, 양조하는 날의 온도와 효모 조건에 따라 술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레시피가 공개되더라도 똑같은 ‘코리안민트’를 만들어낼 수는 없으며, 오히려 과하주라는 장르를 넓히는 씨앗이 될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그의 시선은 한국 술 문화 전체를 향해 있다. 한식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만, 음식과 잘 어울리는 뚜렷한 한국 술이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음식과 페어링할 수 있는 균형 잡힌 술을 만들고자 했고, 그 선택의 결과가 과하주 ‘코리안민트’였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이미 다음 술을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홍은택 작가의 양조 여행기는 제법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술아원을 통해 나올 다음 술은 방앗잎보다 더 오래 연구해온 송순과 오미자 버전이다.
송순은 소나무의 새순으로 청아하고 은은한 향이 특징이며, 고조리서에도 자주 등장할 만큼 오래전부터 즐겨 쓰인 부재료다. 오미자는 이름처럼 단맛·신맛·쓴맛·짠맛·매운맛 다섯 가지를 모두 품고 있어 술에서 개성 있는 맛을 끌어낼 수 있다. 방앗잎과 결은 다르지만 두 재료 모두 한국적인 재료로, 향미와 관능 모두 다른 점이 매력이다. 그만큼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술맛의 폭도 넓어진다.
“코리안민트가 뉴욕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한식과 페어링되는 날을 꿈꾼다”는 홍 작가의 포부에서, 그의 시선은 이미 한국을 넘어 세계를 향하고 있다. 그래서 기회가 오면 ‘과하주연구소’도 차릴 생각이다.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는 술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속도의 세계를 떠나 기다림의 세계로 들어선 이 지식인이 이번엔 세계를 기다리게 할 술을 꿈꾸고 있다.
김승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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