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644년 음력 12월 9일, 울산의 젊은 무과 급제자들이 길을 나섰다. 목적지는 함경도 회령. 국경의 최전방이었다. 이들은 이제 막 급제한 울산의 신출 군관들이었다. 박취문과 박이명·박이돈·이석로(이확) 그리고 언양의 장두민(장준민)·이득영·김사룡 등이다. 지역에서 이름난 가문 출신도 있었지만, 모두 풋내기 무관들이었다. 설렘과 자부심, 그리고 막연한 두려움을 품은 채 부임지로 향했다.
12월 15일 의성에서 경상좌도 군관들이 집합했다. 이후 안동·청송·진보·영해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북상했다. 함흥에 도착해 관찰사의 점고를 받은 뒤 회령으로 복무지를 지정받았다. 울산에서 출발한 지 70여 일만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육로로 이동한 셈이니, 그 노정의 험난함을 짐작할 만하다. 그 여정의 한복판에서 사건이 벌어졌으니 이름하며 '병곡역 난투극'이다.
1644년 음력 12월 21일, 경북 영덕군 병곡면 병곡역. 이곳에서 울산 선달들은 예상치 못한 난투극에 휘말린다. 역원(驛院)은 관리들의 공무 여행을 지원하기 위한 국가 시설이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양반들은 공무가 아니어도 역에 들러 숙식과 말을 제공받았고, 때로는 과도한 접대를 요구하기도 했다. 비용은 제때 지급되지 않았고, 부담은 고스란히 역인들의 몫이었다. 이미 불만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날 병곡역에 갓 급제한 울산의 선달들이 종을 데리고 들이닥쳤다. 역인들의 얼굴에 노골적인 짜증이 배어 있었다. 박취문 일행은 이미 앞선 역에서도 비슷한 냉대를 경험한 터. 젊은 혈기는 이를 단순한 무례가 아니라 '기강 문란'으로 받아들였다.
박이명과 이확이 먼저 나섰다. 자리를 비운 역장을 붙잡아오게 했고, 술에 취한 역장을 거꾸로 매달아 매질하려고 했다. 다른 역에 보내는 일종의 경고라는 계산이었다. 헌데 사태는 뜻밖의 방향으로 번졌다. 역장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과 친척 수십 명이 몰려왔다. 그들 역시 술기운에 격앙돼 있었다. 좁은 방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역장을 매달았던 몽둥이는 거꾸로 선달들을 향했고 몇은 머리가 깨져 피를 흘렸다. 박이명은 손이 묶인 채 무릎을 꿇리고 폭행을 당했다. 양반 체면이 산산이 부서졌다.
부북일기 속 <병곡역 난투사건> AI 이미지. 김잠출 제공
결국 영해부 형방이 출동해 사태를 수습했다. 부사가 부재중이어서 형방이 대신 나서 자초지종을 듣고 선달들의 종 몇 명에게 곤장을 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사실상 역인들의 손을 들어준 셈이었다. 울산의 젊은 군관들은 상처만 입고 쫓기듯 병곡역을 떠나 북을 향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객기나 폭력 시비가 아닌 조선 후기 역 제도의 균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누적된 불만은 작은 불씨 하나로도 폭발한다. 선달들의 치기 어린 '역리 길들이기'는 실은 이미 곪아 있던 현실을 건드린 일이었다.
위의 내용은 '부북일기(赴北日記)'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부북일기는 울산의 무인 박계숙(1569~1646)과 아들 박취문(1617~1690)이 각각 함경도에서 군 복무하며 남긴 종군 일기를 합본한 것이다. 아버지는 1605년 울산을 떠나 회령 보을하진에서 복무하며 기록했고, 아들은 1644년 같은 길을 따라 북방으로 향했다. 한 권 79장 가운데 아버지 기록이 24장, 아들은 55장이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제14호로 지정돼 울산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특히 박취문의 기록은 병곡역 난투극처럼 여정의 세목을 생생히 담고 있다. 울산에서 회령까지의 도로 사정, 각 고을의 분위기, 집결과 점고의 절차, 변방 군영의 일상까지 빠짐없이 적혀있다.
국경의 삶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상급 부대의 순찰, 활쏘기 훈련, 급료와 특혜, 세금과 부역 문제, 조총 제조 실태까지 기록했고 나아가 동침한 여인의 인적 사항, 군관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방직기(房直妓)에 대한 내용과 성생활, 매독 감염 사실도 숨김없이 기록했다. 조선 무관 생활사의 공백을 메워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370여 년 전 울산 청년들의 북방행은 그렇게 한 권의 기록이 되어 남았다. 역리를 길들이려다 오히려 현실의 냉혹함을 배운 사건. 그것이 '부북일기'속 병곡역 난투의 또 다른 의미일 것이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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