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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오래된 이름

할매라는 호칭은 할머니보다 정답다. 뭔가 정리되고 깍듯해서 격식이 느껴지는 할머니보다 더 친근하고 오래되어 그냥 몸에 밴 이름이 할매다. 부침을 겪은 오랜 세월이 한이 되었을 법한데도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이름. 할매를 부르는 순간 모든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오래된 이름

장세련 동화작가

할매라는 호칭은 할머니보다 정답다. 뭔가 정리되고 깍듯해서 격식이 느껴지는 할머니보다 더 친근하고 오래되어 그냥 몸에 밴 이름이 할매다. 부침을 겪은 오랜 세월이 한이 되었을 법한데도 감정의 기복이 느껴지지 않는 이름. 할매를 부르는 순간 모든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졸린 듯 웃음 짓는 얼굴에서는 무엇이든 품을 듯한 너른 마음이 읽힌다. 어떤 이야기도 고개 끄덕이며 들어줄 것 같은 위안의 이름이다. 곱게 구긴 종이처럼 고운 주름이 떠오르고, 조용하게 을러주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등이 굽고 어깨선은 오그라든 모습이지만 둥근 선에서 믿음이 전해진다.

이런 이미지의 '할매(황석영/창비)'는 소설이다. 딱히 주인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무의 입장에서 쓴 이야기다. 작가는 군산 하제마을의 수령 600년 된 팽나무에서 얻은 영감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 나무에 할머니의 고어(古語) 같은 느낌의 이름을 붙여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관조자인 할매는 한 장소에 뿌리내린 채 수백 년을 살면서 수많은 생명과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나무다.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만 읽다가 한 자리에 붙박인 수백 년생 나무의 안목이라니. 낯선 전개가 처음에는 다소 답답하고 지루했다. 생명과학서인가 싶으면 역사서 같고, 지구과학서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읽다 보면 생태보고서 같기도 하다.

개똥지빠귀의 죽음으로 태어난 씨앗이 자라 지난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켜보는 팽나무가 된다. 600년 수령만큼 그 안에 나이테처럼 켜켜이 들어간 여러 시대의 서민사가 중심축이다. 영웅이나 특별한 활약을 펼치는 인물이 없는 평범한 민중의 삶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마치 크기가 다른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가는 듯하다. 각자의 개인사를 보면 스펙터클하거나 다이내믹한 사건도 할매의 눈으로 보면 그저 지나가는 한 세월일 뿐이다. 팽나무의 나이테가 역사의 은유로 읽히는 이유다.

대작가의 시선은 남다르다는 걸 또 알았다. 팽나무의 나이만 보고 서민과 자연의 관계, 생태를 아우른 이야기를 만든 저자의 안목이 존경스럽다. 인간이 보기에 팽나무는 한 그루 당산나무에 불과하다. 그것을 할매인 팽나무의 입장에서 인간을 보는 이야기로 바꾸는 신선함이라니.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이 팽나무에게는 얼마나 우스울까.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거나, 큰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다치고 죽어가는 인간들도 모두 자신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거나 잠시 머물다 가는 숱한 생명 가운데 하나임을 깨닫게 한다.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어 보이지만 인간도 실상 보잘것없게 보이는 개똥지빠귀나 물새 떼, 물고기, 조개류, 풀꽃들이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며 겸허해져야 한다는 게 분명해진다.

우리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다. 대기근 같은 자연이 준 수난도 있지만 대개는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재앙의 역사다. 침략의 역사도 있고, 동족끼리의 칼부림도 있다. 팽나무의 나이테에 박제된 이런 기억들은 한 집단에게는 삶 자체를 관통하며 뒤흔든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 역시 수백 년을 사는 할매에게는 그저 지나는 과정일 뿐이다. 그리 억울할 일도, 자랑스러울 일도, 슬퍼할 일도, 기뻐만 할 일도 아닌 일상에 일희일비하는 내가 돌아 보이는 순간이다.

'이 나무가 통과한 육백 년이라는 시간은 물론 사람이 정한 시간일 뿐이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바다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구분되지 않는 흐름 가운데 있다'

팽나무와 더불어 600년을 생각해보기로 했다는 작가의 말 일부다.

할매를 덮고 지나간 바람은 지금도 어린나무 곁을 스쳐 간다. 세상을 오래 바라본다는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일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을, 팽나무는 말없이 가르쳐 준다.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지 모른다.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는 말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오늘 내가 내딛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600년이 담긴 한 권의 책. 지나고 보니 그리 긴 시간이 아니라는 할매의 조용한 가르침이 담겼다. 그렇더라도 인간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몫을 다 해야 한다는 묵언에 마당의 한 그루 어린나무를 대하는 마음까지 달라지는 아침이다. 장세련 동화작가

장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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