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팰리서 캐피탈(Palliser Capital)은 미국 엘리엇 매니지먼트(Elliott Management) 홍콩 사무소 대표 출신인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가 창업했다. 팰리서 캐피탈은 단순한 고배당 요구나 단기 차익 실현을 넘어,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인프라 등 글로벌 메가 트렌드에 편입될 수 있는 기업의 핵심 B2B 기술을 발굴하여 가격 정상화를 요구하는 점이 특징이다.
2021년 설립 이후 아시아 자본시장에서 전통 소비재 기업과 지주회사를 대상으로 지배구조 개선 및 주주환원을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기업 재무제표 내 사업 부문에 혼재되어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미스프라이싱(Mispricing)'과 지주사 구조로 인한 '복합기업 할인(Conglomerate Discount)' 현상을 지적하고, 이를 해소하여 기업가치를 현실화하는 전략을 취한다.
소비재 회사 아지노모토에서 테크 기술 발굴
일본 시장에서 팰리서 캐피탈이 진행한 투자 포트폴리오는 전통 기업 내 숨겨진 딥테크(Deep Tech) 역량에 집중되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의 식품 기업 아지노모토(Ajinomoto)다. 아지노모토가 생산하는 아미노산 기반 절연 필름인 'ABF(Ajinomoto Build-up Film)'는 전 세계 CPU 및 GPU 고성능 패키징 시장에서 95%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팰리서 캐피탈은 6개월간 지분을 매입해 아지노모토의 25대 주주로 등극했다. 이후 팰리서 측은 식품사업의 실적이 재무제표상 '헬스케어 및 기타' 부문에 포함되어 AI 소재 기업으로서의 프리미엄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ABF의 공급 가격을 30% 인상하고, 전자 소재 사업부를 별도의 독립 세그먼트로 분리 공시할 것을 경영진에 요구했다.
비데 회사를 실리콘 웨이퍼 핵심 부품사로, 토토 주가 70% 상승
비데와 위생 도기를 생산하는 토토(TOTO) 역시 유사한 논리로 팰리서 캐피탈의 타깃이 됐다. 토토는 정밀 세라믹 기술을 바탕으로 반도체 제조 장비 내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고정하는 핵심 부품인 정전척(Electrostatic Chuck, 정전기 힘을 이용해 반도체 웨이퍼를 고정하는 장치)을 생산하고 있다. 이 세라믹 사업 부문은 토토 전체 영업이익의 40%~50%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팰리서 캐피탈의 개입과 AI 인프라 수혜주라는 사실이 시장에 알려지면서 토토의 주가는 1년 동안 약 70% 상승했다.
이외에도 팰리서 캐피탈은 철도 사업자인 게이세이 전철(Keisei Electric Railway)이 도쿄 디즈니랜드를 운영하는 오리엔탈 랜드의 지분을 과도하게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본업 이외의 유휴 자산 매각을 통한 주주 가치 제고를 이끌어냈다. 또한, 고성능 기판용 유리섬유(T-glass)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닛토보(Nittobo) 등 숨겨진 밸류체인 핵심 기업들을 포트폴리오에 편입시키고 있다.
한국 자본시장 상륙...SK스퀘어 10대 주주 등극, '지주사 할인' 맹점 공략
팰리서 캐피탈은 일본에 이어 한국 자본시장에서도 보폭을 넓히고 있다. 최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팰리서 캐피탈은 SK스퀘어의 지분을 매입하여 10대 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SK스퀘어는 SK하이닉스라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장의 구조적 문제인 '지주사 할인' 현상으로 인해 순자산가치(NAV) 대비 낮은 시가총액을 형성하고 있다. 팰리서 캐피탈 측은 SK스퀘어 경영진에 이사회 합류를 제안하고, 지주사 할인율을 축소하기 위한 대규모 자사주 매입 및 소각 등 강력한 주주환원 정책을 요구했다.
더불어 삼성물산을 대상으로 한 가치 제고 캠페인에도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등 한국 증시의 '밸류업(Value-up)' 기조와 맞물려 지배구조가 불투명하거나 자산 가치가 저평가된 기업들을 선별하여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팰리서 캐피탈의 행보는 과거 단기 차익 실현에 집중하던 1세대 행동주의 펀드와 궤를 달리한다. 기업의 사업 구조를 분해하여 시장이 인지하지 못하는 기술적 가치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이를 글로벌 산업 트렌드와 결합하여 본질적 가치를 재평가받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자본시장에 순기능을 제공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개입이 단기적인 주가 부양을 위한 사업부 분할이나 매각으로 이어질 경우, 기업의 장기적인 연구개발(R&D) 연속성과 경영 안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중기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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