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넘어 이웃의 삶까지 살핀 최불암…그가 남긴 발자취
2026년 10월 30일(금) 11:02
배우 최불암이 지난 29일 향년 87세로 별세했다. 14년간 KBS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며 전국 곳곳의 음식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온 고인의 모습. <KBS제공>
“배우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을 대신해야 한다.”
연기란 사람들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일이라고 믿었던 배우 최불암(본명 최영한). 정의로운 형사부터 자상한 아버지까지 평범한 이웃의 삶을 그려내며 67년간 안방극장을 지켜온 그가 지난 29일 별세했다. 향년 87세.
30일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전날 오후 10시께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숨을 거뒀다. 지난해 3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재활에 힘써왔으나 최근 건강이 악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불암은 2007년 펴낸 에세이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배우라는 오래된 대사에 관하여’에서 배우는 겉모습을 꾸미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맡은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사람의 삶을 진실하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작은 소품 하나에도 인물의 성격과 생활이 드러나도록 세심하게 신경 썼다.
대표적인 작품이 ‘수사반장’이다. 극 중 박영한 반장은 범인을 잡는 데만 몰두하는 형사가 아니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도 다시 살아갈 기회를 주려 했고, 어려운 이웃의 사정에도 귀를 기울였다. 드라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실제 사건을 해결해 달라며 방송국을 찾아오는 시민들도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다며 찾아온 전과자에게 장사를 해보라고 리어카를 마련해준 일화도 전해진다.
작품은 그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인은 1997년 인터뷰에서 ‘수사반장’에 출연하면서 술을 즐기던 습관까지 달라졌다고 털어놨다. 시청자들에게 올바른 형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일상에서도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연기뿐 아니라 인생을 다시 배웠다고 회고했다.
‘전원일기’에서는 그가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을 보여줬다. 고인은 생전 이 작품에서 ‘그늘 넓은 느티나무’ 같은 아버지를 그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힘든 일을 겪은 이웃을 위로하고, 마을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해결책을 찾는 어른이었다. 가족과 이웃 간의 정이 점차 희미해지던 시절, 그가 보여준 모습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가 작품 밖에서 가장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아동복지였다. 1981년 ‘전원일기’에서 금동이를 입양하는 이야기를 연기한 것을 계기로 초록우산과 인연을 맺었다. 1985년부터 전국후원회장을 맡아 어려운 환경의 어린이를 위한 모금과 후원 활동에 앞장섰다.
배우 최불암. /연합뉴스
소년수형자들이 사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에도 힘썼다. 2000년 천안소년교도소에서 소년수형자들과 뮤지컬 ‘춤추는 별들’을 공연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후 사단법인 제로캠프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교정시설 청소년들에게 연극과 음악을 배울 기회를 제공했다. 잘못을 저지른 청소년들도 새로운 꿈을 꾸고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이러한 공로로 제로캠프는 2024년 교정발전 특별상을 받았다.
나이가 든 사람들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남다른 생각이 있었다. 그는 생전 “노인은 아름답다. 그들의 입장을 존중하고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젊은 시절부터 수많은 노인 배역을 맡았던 고인은 나이 든 사람의 몸짓과 말투뿐 아니라 오랜 세월 살아오며 쌓인 경험과 생각까지 연기로 담아내려 했다.
2011년부터 14년간 진행한 KBS ‘한국인의 밥상’에서도 이웃을 향한 관심은 이어졌다. 전국 각지를 찾아 지역의 음식과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밥 한 끼에 깃든 가족의 정과 고향의 기억을 전하며 시청자들에게 친근한 진행자로 자리 잡았다.
고인은 연기와 사회공헌 활동을 통해 쌓은 공로를 인정받아 1998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으며, 2014년에는 한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지난 6월에는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모은영 한국영상자료원장과 함께 입원 중인 고인을 찾아 쾌유를 기원하기도 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례는 오랫동안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해 힘써온 뜻을 기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치러진다.
/장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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