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거버넌스포럼서 학계·당국 한목소리로 감독원 신설 촉구
AI 데이터센터 등 새 부하자원 그리드코드 적용 시급 지적도
이경훈 전기위원회 사무국장이 14일 서울스퀘어에서 열린 전력거버넌스 포럼에서 '재생에너지 100GW 시대의 전력 거버넌스 방향'을 주제로 발제를 하고 있다.
[이투뉴스] "에너지전환 과정에 우리가 겪는 가장 큰 병목현상 중 하나가 그리드코드(Grid Code, 전력망 신뢰도 확보기준)의 후행성(後行性)이다. 기술발전과 재생에너지 보급속도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규제가 사후조치로 전락하고 있다."
손성용 가천대 차세대에너지시스템융합학과 교수는 기후에너지부 전기위원회와 전력거래소, 한전 등이 14일 서울스퀘어에서 주최한 '전력거버넌스 포럼' 토론회에서 "이제는 계통에 문제가 터진 후 땜질식으로 규정을 덧붙이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그리드코드는 전력망에 접속하는 발전자원들이 망(網) 운영의 안전성 유지를 위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요건을 담은 기술규정을 말한다. 정부는 전력계통 신뢰도 및 전기품질 유지 기준 관련 고시로, 한전은 송·배전 설비 이용규정과 신재생발전기 연계 기술기준으로, 전력거래소는 시장운영 규칙으로 각각 이를 규정·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각 기관간 역할과 책임, 이해관계 등이 상충하거나 파편화 돼 있어 사후약방문식 대응이 이뤄져 왔고, 이런 난맥상이 전력시스템 전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게 손 교수의 진단이다.
그가 꼽은 대표적 부작용은 ▶전력망 불안이 가시화 된 후 새 기술요건을 강제해 발생하는 기존설비의 규제 수용성 저하 ▶기존 설비 새 규제 적용과 출력제어 손실보전을 위한 막대한 공적 보조금 투입 ▶규제 불확실성으로 인한 민간투자 위축 및 재생에너지 보급 지연 등이다.
손 교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장 오늘만 필요한 최소 요건이 아니라 5년뒤, 10년 뒤 전력망 변화를 미리 염두에 두고 설계하는 '미래형(Future-Proof) 그리드코드'가 절실하다"면서 "시점별 목표를 도출하고 가장 적합한 이행체계를 선택해 실행하는 로드맵 기반의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아무리 정교한 로드맵도 전력분야 거버넌스 재편과 컨트롤타워 부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공염불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손 교수는 "기후부는 전기본이나 전력망 계획 같은 거시목표를 세우지만 그리드코드를 적기 업데이트할 민첩성이 부족하고, 한전과 거래소는 전력망 기술적 한계와 현실을 가장 잘 알지만 발전사업자에게 규제를 강제하거나 보상할 권한이 부족하다"면서 "전기위가 심판 역할을 해야하지만 독립성과 전문인력이 없어 한계가 있다. 전력감독원 같은 독립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곽은섭 한전 계통기획처장, 최홍석 전력거래소 계통혁신처장, 주성관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좌장), 송승호 광운대 전기공학과 교수, 허진 이화여대 기후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 손성용 거찬대 전기공학과 교수, 이경훈 전기위원회 사무국장이 전력거버넌스 포럼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
허진 이화여대 기후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재생에너지와 같은 인버터 기반 전원(IBR, Inverter Based Resource)의 그리드코드를 총괄할 운영기구 신설이 시급하다며 북미전력신뢰도기구(NERC) 산하 미국 텍사스주 관할기관인 TRE(Texas Reliability Entity) 벤치마킹을 조언했다.
TRE는 풍력 약 40GW, 태양광 30GW, 배터리ESS 10GW가 보급된 텍사스 단일 전력망에서 그리드코드를 개정·보완하고 계통신뢰도평가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NERC와 FERC(연방규제위원회) 규제승인을 받아 북미에서 유일하고 단일 주(州)와 단일계통을 감시·규제하고 있다.
허 교수는 "IBR의 그리드코드를 만들기 위해 한전과 연계기준 마련 작업을 했었는데, 계통운영기관인 전력거래소와 송배전망사업자인 한전을 총괄할 운영체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면서 "TRE의 경우 전력계통의 복잡도가 증가하고 데이터센터가 늘어나자 단순 신뢰도 규제에서 리스크기반 신뢰도 관리로 방향을 전환했다. 향후 전력감독원도 TRE 역할과 방향을 잘 확인해 다양한 수요자원과 부하자원에 대한 그리드코드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앞서 송승호 광운대 전기공학과 교수(전기위원회 위원)는 '그리드코드 현황과 개선 방향'이란 제목의 발제에서 현행 그리드코드 적용 및 운영현황 문제점을 거론하며 "그리드코드는 필요에 따라 주기적이고 지속적으로 개정작업을 해야하고 (사업자들이) 따라와야 하는데, 막상 진행해보면 잘 안되고 있다"며 계통연계규정 확립을 촉구했다.
가령 일부 해상풍력이나 대규모 태양광은 발전사업허가를 받은 뒤 한전과 전기설비 이용계약을 맺을 때까지 발생하는 시차 탓에 2020년 이미 개정된 그리드코드를 적용하지 않고 계통에 접속하고 있다. 또 출력제한 지시나 순간 저전압 사고 때 그리드코드대로 규정이 준수되는지 발전소별 점검이 이뤄지지 않아 실제 상황 시 정상 작동여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2019년부터 경부하 때 호남권에서 과전압 현상이 나타나 스태콤과 같은 조상설비에 의존하고 있지만, 이미 코드에 있는 재생발전기 무효전력 제어(전압)는 활용하지 않고 있다.
당국이 발전사업자들에게 계통해석 시뮬레이터(PSSE, PSCAD) 시뮬레이션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검증이나 활용방안이 불확실한 것도 개선사항으로 지목했다. 유럽은 최종 승인에 앞서 발전기 단위와 발전단지 단위로 나눠 2단계 인증을 받도록 하고 있다.
송 교수는 "우리도 그리드코드의 내용은 거의 갖췄지만 실행력이 부족하고 미이행 시 처벌 등 이행 준수체계 정비도 시급하다"면서 "당국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한다. 안 지켜도 그만이 아니라, 그런발전기는 퇴출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전력거래소와 한전도 현행 그리드코드 정비 및 규제체계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인정했다.
송승호 광운대 교수가 그리드코드 고도화 방안을 주제로 발제하고 있다.
최홍석 전력거래소 계통혁신처장은 "현행 법령상 그리드코드는 전기위가 아니라 기후부 소관"이라며 "(코드) 이행여부가 중요한데 측정·관리가 안되고 있다. 고장이나 큰 이슈가 터진 뒤에야 사후적으로 코드를 보완하고 있는데, 이는 계통운영자 관점에서 큰 취약점"이라고 말했다.
최 처장은 "계통은 점점 취약해지는데, 성능개선 조치 명령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계통 취약성이 내재화 되고 신뢰도 안전 불감증은 확대되고 있다"며 "실질적인 계통 감독기능이 부재한 상황에서 피규제기관인 거래소와 한전이 그런 기구의 필요성을 역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은 많은 의미를 시사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국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 구조와 기술규제가 국민안전과 국가발전의 선순환 구조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전력감독원 신설이 절실하며, 이를 통한 신뢰도 관리체계 구축이 최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곽은섭 한전 계통기획처장도 "전력망 편중과 송전망 부족, 출력제어 상시화, 가격신호 왜곡 등 현형 규제체계로 감당하기 어려운 구조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며 전문 규제 기관 신설 필요성에 공감을 표했다.
그는 전력감독원과 전기위 이원화 구조가 정착하기 위한 조건으로 ▶각 기관의 전문성 확보 ▶기관간 역할 경계 명확화 ▶계통 신뢰도 평가와 그리드코드 관리 등 기술적 경계가 명확한 기능부터 수행 ▶독립성 확보를 위한 재정 자립 확보 등을 제시했다.
곽 처장은 "거시정책은 정부부처, 규제 심의의결은 전기위, 기술기준 수립운영은 전력감독원이 각각 맡되 한전과 전력거래소가 현장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협력하는 구조가 돼야한다. 각자가 서로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상호보완적으로 기능할 때 그리드코드가 실질적 효력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AI데이터센터에 대해서는 "수백MW급 부하가 밀리초단위로 움직이는데, 우리 계통에 들어왔을 때 과연 기존 송전선로나 전통 설비들이 버틸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이 있다"면서 "해외보다 훨씬 심각하게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결국은 속도다. 현장에서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어려움이 있다. 전력감독원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경훈 전기위원회 사무국장은 '재생에너지 100GW 시대의 전력 거버넌스 방향'을 주제로 한 발제에서 "전력거래소 회원사가 2001년 19개사에서 현재 7096개사로, 한전PPA 거래는 18만개사로 증가했다. 참여사업자는 증가하고 전력거래의 형태도 PPA, 직접구매, 구역전기, VPP(가상발전소) 등으로 다양해지고 시장구조도 고도화 되고 있다"며 "감독원은 전력망 감독과 시장 공정성 감시, 소비자 보호, 분산데이터 통합 등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국장은 2013년 9.15 순환정전 때 추진된 옛 전력감독원 신설이 당시 상임위 전체회의서 무산된 사례와 관련, "이번에는 그때와 맥락이 다르다. 그 당시에는 재생에너지가 얼마 안됐지만 이젠 100GW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계통과 시장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독립 전문기관 신설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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