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현지시간) 밤 한강 작가의 대표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낭독공연 <새>를 보기 위해 아비뇽 교황청 명예극장에 모인 관객들. 노정연 기자
한낮의 열기가 물러간 아비뇽의 여름밤, 고도(古都)의 심장 교황청 무대에 한강의 문장이 울려 퍼졌다. 제80회 아비뇽 페스티벌이 사상 처음으로 한국어를 공식 초청 언어로 선정한 가운데, 15일(현지시간) 한강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낭독공연 <새>(Oiseau)가 교황청 궁전 명예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가 소설의 1장을 무대화한 이 공연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작품을 한국 배우 이혜영과 프랑스의 이자벨 위페르가 두 개의 언어로 들려주는 낭독극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어둠이 내려앉아 불을 밝힌 교황청 무대는 공연 시작 전부터 1900석 규모의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로 장관을 이뤘다. 중세 고딕 양식의 교황청 돌벽을 배경으로 펼쳐진 무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을 자아냈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원작으로 한 낭독극 <새>의 낭독자로 무대에 오르는 프랑스의 이자벨 위페르(왼쪽)와 한국 배우 이혜영. 아비뇽 페스티벌
원작은 주인공 경하가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고, 홀로 남겨진 인선의 앵무새를 구하기 위해 눈보라를 뚫고 제주 중산간의 인선의 집으로 향하는 여정을 그린다. 제주에서 경하는 인선의 가족이 겪었던 제주 4·3 의 참혹한 역사를 접하며 깊은 애도의 시간을 갖게 된다.
작은 새소리와 함께 흰옷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 두 낭독자는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주고받으며 손가락 절단 사고를 당한 인선이 입원한 병원으로, 폭설이 내리는 제주로, 군경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수십 년 전 그날로 관객들을 이끌었다. 낭독극이라는 형식이 무색할 만큼 두 배우는 절제된 몸짓과 목소리만으로 경하와 인선의 감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무대 뒤 돌벽에 프랑스어·영어 자막이 차례로 새겨지며 하나의 기억과 감정으로 이어졌다.
15일(현지시간) 아비뇽 교황청 무대에 오른 <새> 공연이 끝난 후 무대 인사를 하는 한강. 노정연 기자
15일(현지시간) 아비뇽 교황청 무대에 오른 <새> 공연이 끝난 후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왼쪽부터), 한강 작가, 한국 여배우 이혜영이 객석을 바라보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공연 끝 무렵, 한강이 직접 무대에 올랐다. 흰옷을 입은 한강은 제주 4·3과 한국전쟁 초기 민간인 학살의 기억이 맞닿는 대목을 조용히 읽어 내려갔다. 전쟁과 트라우마, 아이들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 객석은 숨을 죽였다.
약 90분간 진행된 공연은 자정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한강과 이혜영, 위페르가 무대 인사를 마치고 퇴장한 뒤에도 박수가 잦아들지 않자 다시 무대 앞으로 나와 객석을 바라보며 5분 가까이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15일(현지시간) 밤 한강 작가의 대표작 <작별하지 않는다>를 바탕으로 낭독공연 <새>가 아비뇽 교황청 명예극장에서 초연됐다. 노정연 기자
공연이 끝난 뒤 객석을 빠져나오던 프랑스 관객 크리스 마르탱은 “한국어를 소설로 듣는 독특한 경험이었다”며 “한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지만 슬픔과 애도의 감정이 충분히 전해졌다”고 말했다.
이번 축제에서는 이탈리아 극단 INDEX의 다리아 데플로리안이 연출한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도 18일까지 카르멘 수도원 회랑에서 공연된다. 이 작품 역시 <작별하지 않는다>를 각색한 연극으로, 데플로리안은 배우 모니카 피세두와 함께 무대에 오른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는 한강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또 하나의 작품이 공연되고 있다. 이탈리아 연출가 다리아 데플로리안의 신작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 아비뇽 페스티벌
데플로리안은 앞서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연극으로 옮긴 데 이어 다시 그의 작품을 무대화했다. 이번 작업을 준비하며 모니카 피세두와 함께 제주를 찾아 4·3평화공원을 방문한 그는 “제주의 풍경과 바다를 본 뒤 이탈리아로 돌아와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 작품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그는 한강 작품에 매료된 이유로 “폭력을 다루는 방식”을 꼽았다. 데플로리안은 “한강은 사적인 폭력과 국가가 행사하는 제도적 폭력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긋지 않는다”며 “그 두 층위를 끊임없이 교차시키는 방식이 매우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한강 “배재고 사태는 혐오의 문제···기성세대도 실패를 돌아봐야”
“혐오라는 문제가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에 강렬하게 대두돼 있는데 이걸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가 우리에게 중요한 숙제인 것 같아요. 우리가 혐오가 자연스러운 게 아니고 문제적인 것이다라는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다면 거기에 희망이 있는 게 아닐까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56)이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전쟁과 갈등, 분열 문제에 대해...
https://www.khan.co.kr/article/202607160913011
한강 “문학은 우리를 삶으로 한 발 나아가게 한다”···아비뇽서 전한 ‘연결의 기적’
세계 최대 공연예술축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아비뇽. 12일(현지시간) 한낮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생루이 회랑(Cloitre Saint-Louis)은 한강 작가를 만나기 위해 모인 관객들로 가득 찼다.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공개 석상에 좀처럼 나서지 않던 한강 작가가 아비뇽 페스티벌 공식 프로그램인 ‘카페 데 이데(Cafe des ide...
https://www.khan.co.kr/article/202607122139001
영문번역(English Translation)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