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I 생성이미지
인공지능(AI)이 신약개발의 보조 도구를 넘어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으면서 '누가 더 많은 GPU를 확보했는가'가 곧 경쟁력으로 직결되는 시대가 열렸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엔비디아(NVIDIA)가 있다. 로슈(Roche)와 일라이 릴리(Eli Lilly)는 각각 대규모 GPU 인프라를 구축하며 사실상 ‘AI 팩토리’ 경쟁에 돌입했다.
최근 로슈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블랙웰(Blackwell)’ GPU를 기반으로 3500개 이상의 인프라를 구축하며 업계 최대 규모의 컴퓨팅 환경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연구개발을 넘어 생산 공정까지 가상화하는 '디지털 트윈'을 구현하고 비만치료제 등 주요 의약품의 공급 병목 해소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릴리 역시 인디애나폴리스 본사에 자체 슈퍼컴퓨터 '릴리팟(LillyPod)'을 구축했다. 블랙웰 울트라 GPU 1000여 개가 탑재된 이 시스템은 신약 후보물질 발굴 기간을 최대 70% 단축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 엔비디아와 공동 연구소 설립, 무인 실험실 구축까지 더해지며 AI 기반 연구·생산 자동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결국 글로벌 빅파마의 경쟁은 명확하다. 신약개발 역량이 '과학자 수'가 아니라 '컴퓨팅 파워'로 재정의되는 흐름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생산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췄다. 5공장을 포함한 생산라인에 AI 기반 디지털 트윈을 도입하며 공정 최적화와 품질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전략이다.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 ‘예측 기반 생산 체계’로의 전환이 핵심이다.
셀트리온은 데이터 중심 접근을 택했다. 축적된 바이오시밀러 임상 데이터를 기반으로 AI 항체 설계 플랫폼을 고도화하고, 미국 생산 거점과 연계해 원가 경쟁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자본 규모에서의 격차를 데이터와 실행 속도로 극복하겠다는 구상이다.
국내 기업들의 공통된 인식은 분명하다. AI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 조건이라는 점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존 림 대표는 "AI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운영 혁신이 필수 과제"라고 강조했고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 역시 "AI를 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핵심 변수"로 규정했다.
종근당은 AI를 통해 연구개발 투자 선순환 구조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했고, 대웅제약은 AI 기반 병상 모니터링 시스템을 실제 의료 현장에 적용하며 사업화 단계까지 확장했다.
SK바이오팜은 연구개발 전 주기를 AI 중심으로 재설계해 'AI로 일하는 제약사'로의 전환을 선언했고 유유제약 역시 생산·운영 전반에 AI와 로보틱스를 접목해 효율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끌어올리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가 GPU와 초거대 인프라로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면, 국내 기업들은 데이터와 현장 적용력, 실행 속도를 무기로 격차를 좁히려는 구도다. 향후 경쟁의 승패가 개별 기업의 투자 수준을 넘어 국가 차원의 AI 인프라 확보 여부에 달려 있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업계 관계자는 "신약개발 경쟁은 더 이상 실험실 규모가 아니라 컴퓨팅 자원과 데이터 활용 능력에서 결정된다"며 "국내 기업들이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초거대 AI 인프라에 대한 공공 차원의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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