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생명 ‘제우스’ 최우제. 라이엇 게임즈 제공
‘제우스’ 최우제는 잉크로 찬 스포이드 같다. 라이엇 게임즈가 제한해놓은, 탑라인에서 흩뿌릴 수 있는 영향력 그 이상을 자꾸만 퍼트리려고 한다. 그는 점점 높이 올라가서 더 멀리, 더 많이 그의 흔적을 남긴다. ‘기인’ 김기인은 방수지(防水紙) 같다. 맞라이너 외의 4인이 아무리 그에게 무언가를 뿌려대도, 더럽히려 들어도 약간의 흡수도 허용하지 않은 채로 전부 흘려보낸다.
한화생명e스포츠와 젠지가 5일 서울 종로구 LCK 아레나에서 2026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승자조 3라운드 경기(승자조 결승전)를 치렀다. 젠지의 3대 1 승리로 끝나 젠지가 최종 결승전으로 향했다. 한화생명은 패자조로 내려갔다.
양 팀의 탑라이너는 자신들이 왜 세계 최고의 탑라이너로 꼽히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줬다. 우선 첫 세트에선 최우제가 제이스로 탑이 펼칠 수 있는 영향력 그 이상을 발휘했다. 제이스를 선택한 그는 김기인(요릭)을 라인전에서 부드럽게 누르고, 순간이동을 이용한 한타 합류로 상대 바텀 듀오를 잡아냈다. 순간이동 전부터 해머폼과 캐논폼을 바꿔가며 시동을 걸더니, 결국 두 폼으로 모두 킬을 따낸 건 그의 특별한 제이스 숙련도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후에도 그의 활약은 계속됐다. 탱커를 잡기 위한 도미닉 경의 인사 구매도 돋보였다. 그가 게임의 흐름을 읽고 그에 따라 유동적으로 아이템 트리를 바꾸는 선수라는 건 이미 올 시즌 여러 차례 증명됐고, 이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젠지 ‘기인’ 김기인. 라이엇 게임즈 제공
최우제가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자 김기인은 수비로 반격했다. 그의 수비력이 가장 눈에 띈 건 3세트. 그는 그웬을 선택했다. 바텀에서 애쉬·세라핀 대 직스·파이크 구도가 만들어진 상황. 당연하게도 한화생명은 직스를 혼자 두고 파이크를 위로 올려 탑 구도를 무너트리려 했다. 그리고 김기인은 한화생명의 수를 거의 다 읽고, 대응했다.
부러지지 않는 탑은 얼마나 귀한가. 김기인은 ‘카나비’ 서진혁(판테온)의 갱킹에 당해 데스를 당하기도 했지만 절대로 치명상은 허용하지 않았다. 상대가 과하게 턴과 스킬을 투자할 때만 잡혀줬다. 그가 잡힐 때마다, 포탑 뒤로 도망갈 때마다 역설적으로 젠지는 골드와 나머지 병력의 성장 시간을 벌었다.
결국 판테온과 파이크 조합의 강점이 살아날 수 있는 난전 상황을 최대한 회피한 채로 젠지가 ‘밸류의 젠지’의 시간을 맞았고, 이날 시리즈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뒀다. 김기인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상대 챔피언들을 봤을 때 딱 봐도 탑을 죽이러 온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최대한 라인 형성을 좋게 하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고 말했다.
다른 라인의 개입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건 비단 수비에만 국한된 능력이 아니다. 4세트에서 반대로 김기인이 공격하는 바루스 대 나서스 구도가 나왔다. 서진혁(나피리)이, ‘제카’ 김건우(사일러스)가 그 구도를 비틀기 위해 개입했지만 그는 끝내 공격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다. 김기인은 “아무래도 내가 압박해야 하는 매치업이었다. 상대가 오는 걸 신경 쓰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배제하면서 압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잘 된 거 같다”고 말했다.
이날은 결국 김기인이 판정승을 거뒀지만 두 팀 탑라이너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승패의 세계 이상의 것으로 그저 황홀한 수준이었다. 둘은 다시 결승전에서 높은 수준의 경기를 펼칠 수 있을까. 우선 결승에 먼저 오른 김기인은 한화생명 또는 T1이 결승에 올라올 것 같다고 예상했다. 한화생명 윤성영 감독은 “젠지가 너무 단단했다”며 “우리가 더 정교해야 뚫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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