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민정 칼럼니스트] 봄이 찾아오고 있다. 계절의 변화는 단순한 기온의 상승이 아니라, 감각의 확장이기도 하다. 겨울 동안 움츠러들었던 시선과 몸이 다시 열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미술에서는 데미안 허스트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들이 한국을 찾고, 무용계에서는 같은 영국 출신인 웨인 맥그리거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난다. 서로 다른 장르이지만 한 시기에 한국을 찾는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 예술의 흐름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신비함으로 덧 입은 움직임
그 중에서도 맥그리거의 '딥스타리아'는 유독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신비로운 별처럼 들리는 이 이름은 심해에 사는 '해파리 종'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은 마치 깊은 바다 속을 유영하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어둠에 잠긴 공간 속에서 무용수들은 끊임없이 흐르고, 접히고, 다시 이어지며 움직인다. 그들의 몸은 해류를 따라 떠다니는 생명체처럼 유연하게 변형되다가도, 순간 하나의 덩어리로 응집된 뒤 다시 흩어진다. 이러한 유기적인 움직임은 단순한 동작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넘어 무대 전체의 그림으로 하나의 생태계를 보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작품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맥그리거 특유의 정교한 연출력에서 비롯된다. 그는 움직임을 단순히 배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공간과 빛, 그리고 시간의 흐름까지 치밀하게 구성한다. 특히 조명을 통해 신체의 윤곽은 시각적 긴장을 극대화하며, 보이지 않는 것에서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감각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 작품이 '심연'이라는 이미지로 설명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무용수들은 리드미컬한 음악 위에서 펼쳐지는 대각선 형태의 움직임은 꽤 흥미로운 언어적 요소가 담겨 있다. 캐논 형식으로 시차를 두고 반복되며 전진하고 그 과정에서 명확한 공간적 관계를 형성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개인의 기량보다는 전체의 흐름 속에서 움직임이 조직된다는 점이다. 무용수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집합적 신체를 형성한다. 그러나 동시에 최소한의 의상 속에서 드러나는 근육의 세밀한 움직임은 인간적인 생동감을 놓치지 않는다. 이로써 '딥스타리아'는 추상적이고 비인간적인 심해의 이미지와 살아있는 신체의 감각 사이를 오가며 독특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작품으로 완성된다.
'딥스타리아'. 사진=스튜디오 웨인 맥그리거 공식 홈페이지
AI는 또 다른 무용수
'딥스타리아'는 무용이 지닌 종합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본래 무용은 음악과 미술, 공간이 결합된 예술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진다. AI를 기반으로 한 음향 시스템은 실시간으로 소리를 재구성하며, 기존의 음악처럼 명확한 구조를 따르지 않고 흐르듯 이어진다. 기계음과 전류음, 낯선 울림이 뒤섞인 사운드는 무용수의 움직임과 맞물리며 또 다른 감각을 만들어낸다.
무대는 우주정거장 코팅 도료로 개발한 '밴타 블랙(Vantablack)'으로 칠해진다. 빛의 99.965%를 흡수하는 현존하는 가장 완벽한 검은색 중 하나다. 맥그리거는 "끝을 알수 없는 구멍처럼 느껴지는 무대 위 칠흑 같은 공허에 살아 숨 쉬는 무용수들을 대비시키고 싶었다"라고 했다.
이러한 기술의 개입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자극을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익숙한 리듬과 구조가 사라진 자리에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움직임 자체에 더 집중하게 되고, 무대는 '보는 것'을 넘어 '느끼는 것'으로 전환된다.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무용은 보다 동시대적인 언어를 획득하며, 새로운 방식의 경험을 제시한다.
그리고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가장 강하게 남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몸'이다.
빛을 삼켜버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무용수들의 몸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숨소리, 근육의 긴장,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균형과 방향, 그리고 서로의 호흡을 감지하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타이밍의 차이는 어떤 기술로도 완전히 재현될 수 없는 영역이다. 특히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움직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은 어긋남은 오히려 더 강한 생동감을 만들어내며, 살아 있는 몸의 감각을 극대화한다.
결국 '딥스타리아'는 기술을 통해 확장된 무대를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더욱 또렷하게 드러내는 작품이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인간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비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가장 검은 심연 속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몸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은 조용하지만 강하게 증명한다.
봄의 무대 위에서 '딥스타리아'는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기술의 진보인가, 아니면 그 속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인간의 존재인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예술의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딥스타리아'. 사진=스튜디오 웨인 맥그리거 공식 홈페이지
노민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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