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박철성 기자 〈리서치센터 국장·칼럼니스트〉
■ 속초는 벌써 여름이었다
■ 분당 야탑터미널에서 동해까지, 고속버스 창밖으로 본 1박2일
■ 영랑호·울산바위·설악항·동명항 포차거리·갯배·중앙시장·속초해수욕장…
■ 5월의 속초는 이미 여름을 열고 있었다
▲영랑호 너머로 속초 시가지와 동해가 한눈에 펼쳐진다. 호수와 바다, 그리고 영랑호CC 골프장 페어웨이가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는 풍경이다. 사진=박철성 기자
속초는 벌써 여름이었다.
달력은 아직 5월. 그런데 30도를 찌르는 더위.
바닷가의 공기는 달랐다. 햇볕은 먼저 와 있었다. 바람도 달랐다. 분당을 떠날 때의 공기와 동해 앞에 섰을 때의 공기는 분명히 달랐다.
지난 16일 오후 12시 20분. 분당 야탑터미널을 출발했다.
목적지는 속초였다.
꽉 찬 1박2일 일정이었다. 버스를 탔다. 창밖을 보기 위해서였다.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되는 여행. 창문 너머로 길과 산과 하늘을 따라가는 여행. 그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은 시작됐다.
■ 분당 야탑을 떠나자, 도시는 천천히 뒤로 밀렸다
▲지난 16일 오후 12시 20분, 분당 야탑터미널에서 속초행 고속버스가 출발했다. 꽉 찬 1박2일 속초 기행의 첫 장면은 터미널 승강장에서 시작됐다. 사진=박철성 기자
버스는 분당수서고속화도로로 들어섰다.
가천대를 지났다. 주말이었다. 도로는 양방향 모두 막혔다. 차들은 쉽게 속도를 내지 못했다. 서울과 경기의 경계는 늘 그렇다. 떠나려는 차와 돌아오려는 차가 같은 시간에 엉킨다.
정체도 풍경이 된다.
평소라면 답답했을 도로가 그날은 조금 달랐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정체는 일상의 짜증이 아니라 출발의 일부였다. 누군가는 졸고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누군가는 이미 이어폰을 꽂고 자기만의 여행으로 들어갔다.
하남에 진입하자 버스는 조금씩 제 속도를 찾았다.
오후 12시 49분쯤, 양양 방향으로 흐름이 붙었다. 미사리 풍경이 스쳐 갔다. 강과 도로와 아파트 숲이 한 번에 지나갔다. 남양주TG를 지나자 도시의 밀도는 확연히 낮아졌다.
▲미사리 일대 도로 풍경. 분당을 벗어나 하남을 지나면서 속초행 버스는 조금씩 제 속도를 되찾았다. 사진=박철성 기자
오후 1시 15분쯤, 양양고속도로에 들어섰다.
가평군 설악면을 지났다. 홍천군 서면을 지났다. 동홍천TG를 거쳤다. 창밖은 이제 완전히 달라졌다.
회색이 줄고 초록이 많아졌다.
아파트 외벽 대신 산등성이가 이어졌다. 광고판 대신 나무가 보였다. 도시는 뒤로 밀렸고, 강원도의 능선이 앞에서 다가왔다.
버스는 속초를 향해 달렸다.
그런데 몸보다 마음이 먼저 동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 터널을 지나자, 동해의 기운이 먼저 들어왔다
▲양양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강원도의 산줄기가 이어졌다. 터널을 지나고 또 지나자, 바다 쪽 공기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사진=박철성 기자
강원도 길은 터널의 연속이다.
터널로 들어가면 잠시 어두워진다. 나오면 다시 밝아진다. 그 반복이 이상하게 여행의 리듬을 만든다. 어두웠다가 밝아지고, 막혔다가 열리고, 산속이었다가 하늘이 넓어진다.
양양을 지나 속초 쪽으로 가까워질수록 공기의 느낌이 달라졌다.
바다가 보이기 전부터 바다 냄새가 먼저 온다. 정확히 말하면 냄새라기보다 기운이다. 습도가 조금 달라지고, 바람의 결이 달라진다. 산길 끝에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차린다.
주말 교통체증, 오후 3시30분쯤 속초에 도착했다.
버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알았다.
속초는 이미 여름이었다.
햇볕은 뜨거웠다. 바람은 가벼웠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 계절 앞서 있었다. 반팔, 선글라스, 모자, 슬리퍼. 여행객들은 이미 여름의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5월의 속초는 봄의 끝이 아니었다.
여름의 입구였다.
■ 영랑호, 호수와 바다와 울산바위가 한 프레임에 들어왔다
▲영랑호 주변 풍경. 잔잔한 호수 너머로 속초 시가지와 동해가 이어지고, 한쪽에는 영랑호CC 페어웨이가 펼쳐진다. 사진=박철성 기자
▲영랑호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잔잔한 호수 너머로 설악산 울산바위 능선이 또렷하게 솟아 있다. 속초의 초여름은 바다보다 먼저 산빛으로도 다가왔다. 사진=김종선 르포작가
첫 풍경은 영랑호였다.
영랑호는 속초의 얼굴을 부드럽게 보여주는 곳이다. 바다처럼 거칠지 않고, 시장처럼 북적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용하다고 밋밋한 곳은 아니다.
호수 너머로 속초 시가지가 보인다. 그 뒤로 동해가 열린다. 한쪽에는 영랑호CC 페어웨이가 이어진다. 고개를 돌리면 설악산 울산바위가 또렷하게 솟아 있다.
호수, 도시, 바다, 영랑호CC 페어웨이, 그리고 울산바위.
그 모든 것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
그 장면이 속초답다.
영랑호 너머로 솟은 울산바위는, 속초가 바다의 도시이기 전에 산과 호수의 도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줬다.
속초는 하나의 얼굴만 가진 도시가 아니다. 산이 있고, 호수가 있고, 바다가 있고, 항구가 있고, 시장이 있다. 골목에는 냄새가 있고, 해변에는 빛이 있다. 피란의 기억도 있고, 관광의 활기도 있다.
영랑호 앞에 서면 그 모든 층이 조용히 겹쳐 보인다.
물은 잔잔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수면이 얇게 흔들렸다. 멀리 보이는 속초 시가지는 생각보다 가까웠고, 동해는 그보다 더 멀고 크게 느껴졌다. 울산바위는 그 뒤에서 말없이 버티고 있었다.
■ 설악항, 바다는 냄새로 먼저 도착한다
▲설악항 부두의 어선들. 바다는 멀리서 보면 낭만이지만, 항구 가까이서 보면 누군가의 생계이자 노동이다. 사진=박철성 기자
다음은 설악항이었다.
항구는 관광지보다 솔직하다. 포장된 풍경보다 먼저 냄새가 온다. 생선 냄새, 기름 냄새, 젖은 밧줄 냄새, 바닷물 냄새. 그 냄새들이 섞여 항구의 시간을 만든다.
설악항에는 어선들이 있었다.
바다는 멀리서 보면 낭만이지만, 항구 가까이서 보면 노동이다. 배는 멋이 아니라 생계다. 그물은 장식이 아니라 삶의 도구다. 부두에 놓인 상자와 밧줄과 얼음은 모두 하루의 무게를 품고 있다.
관광객은 바다를 보러 오지만, 항구 사람들은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 항구 풍경은 조금 다르게 보인다.
설악항의 바람은 세지 않았다. 그러나 바다 쪽에서 밀려오는 공기는 분명했다. 짭조름했고, 살아 있었다. 그 바람을 맞고 있으면 속초가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곳은 누군가의 일터다.
그리고 그 일터 위에 여행자의 감탄이 잠시 얹힌다.
■ 동명항 포차거리, 밤이 되자 속초는 더 선명해졌다
▲동명항 포차거리의 밤. 간판 불빛과 사람들의 목소리, 해산물 굽는 냄새가 뒤섞이며 속초의 밤을 만들었다. 사진=박철성 기자
밤에는 동명항 포차거리로 갔다.
속초의 밤은 바다보다 불빛으로 먼저 다가왔다. 항구 주변 식당과 포차의 간판들이 하나둘 켜졌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낮의 바다가 넓은 풍경이었다면, 밤의 항구는 가까운 소리였다.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해산물 굽는 냄새도 섞였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 주문하는 소리, 웃음소리, 파도 소리가 뒤엉켰다.
동명항 포차거리는 세련된 여행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래서 좋았다.
의자를 끌어 앉는 소리. 접시가 놓이는 소리. 옆자리 대화가 살짝 넘어오는 거리감. 그 모든 것이 속초의 밤을 만들었다.
그날 동명항의 밤은 그랬다.
바다는 어두워졌지만, 속초는 더 선명해졌다.
■ 갯배, 500원이 건너게 한 것은 물길만이 아니었다
▲속초 아바이마을과 중앙동을 잇는 갯배. 짧은 물길을 건너는 동안, 속초의 피란과 실향의 기억이 조용히 떠올랐다. 사진=박철성 기자
이번 속초행에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갯배였다.
속초 아바이마을과 중앙동을 잇는 갯배. 지금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체험이 됐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재미 이상의 시간이 있다.
배는 크지 않다. 물길도 길지 않다. 요금도 크지 않다. 그러나 그 짧은 이동 속에 속초의 역사와 감정이 담겨 있다.
갯배는 엔진으로 요란하게 달리지 않는다. 쇠줄을 잡아 끌며 물길을 건넌다. 사람들은 배 위에 서거나 앉아 반대편을 바라본다. 몇 분이면 닿는다. 너무 짧아서 오히려 오래 남는다.
500원짜리 도선.
하지만 그것이 건너게 하는 것은 단지 수로가 아니다.
피란의 기억이다. 실향의 시간이다.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남쪽 바닷가에 만든 삶의 흔적이다. 아바이마을이라는 이름 안에는 관광지 안내판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사연이 있다.
갯배 위에 서면 속초가 조금 달라 보인다.
바다는 여행자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방향이었다.
짧은 물길 하나가 그 사실을 조용히 말해준다.
■ 중앙시장, 속초의 속도는 여기서 가장 빨랐다
▲속초 중앙시장 골목. 닭강정, 오징어순대, 젓갈, 건어물, 해산물이 뒤섞인 시장의 냄새가 속초의 활기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진=박철성 기자
중앙시장으로 들어가자 속초의 속도는 확 달라졌다.
사람이 많았다. 걸음은 느렸지만, 시장은 빠르게 움직였다. 닭강정 가게 앞에는 줄이 섰고, 튀김 냄새가 골목을 채웠다. 오징어순대, 생선구이, 회, 젓갈, 홍게, 건어물. 속초의 이름이 음식으로 펼쳐졌다.
시장은 늘 정직하다.
좋은 시장은 말보다 냄새가 먼저 설득한다. 중앙시장이 그랬다. 눈보다 코가 먼저 반응했다. 발걸음보다 배가 먼저 움직였다.
관광객들은 봉지를 들고 다녔다. 손에는 닭강정 상자가 들려 있었다. 어떤 사람은 즉석에서 먹고, 어떤 사람은 포장해 갔다. 상인들은 익숙하게 손님을 불렀고, 손님들은 익숙하게 줄을 섰다.
중앙시장은 속초의 현재다.
항구가 속초의 노동을 보여준다면, 시장은 속초의 활력을 보여준다. 오래된 도시가 어떻게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지, 시장 골목은 그 답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속초는 과거의 도시가 아니었다.
매일 팔리고, 매일 먹히고, 매일 다시 채워지는 도시였다.
■ 속초해수욕장, 5월인데 이미 여름의 표정이었다
▲속초해수욕장 앞바다. 본격 휴가철은 아니었지만, 모래사장과 파도 앞에는 이미 여름의 표정이 내려앉아 있었다. 사진=박철성 기자
속초해수욕장은 이미 여름의 표정이었다.
모래 위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도 가까이 다가간 아이들도 있었다. 신발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근 사람도 보였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철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다는 이미 시즌을 시작한 듯했다.
파도는 일정하게 밀려왔다.
흰 포말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바람은 머리카락을 흔들었고, 햇빛은 모래 위에 오래 머물렀다. 해변을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급함이 없었다.
속초해수욕장은 단순히 바다를 보는 곳이 아니다.
도시에 묻은 피로를 잠시 내려놓는 곳이다. 아무 말 없이 파도만 봐도 되는 곳이다. 대화가 끊겨도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 앞에 선다.
그 여름의 감각은 호텔 수영장에서도 이어졌다.
▲호텔 수영장에는 이미 여름이 와 있었다. 달력은 5월이었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반짝이는 물빛은 한 계절을 앞질러 있었다. 사진=박철성 기자
5월의 수영장.
말로만 들으면 조금 이르다. 그런데 속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미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어른들은 선베드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물결을 바라봤다.
수영장 물빛은 밝았다. 햇볕은 반짝였다. 바다를 보고 온 뒤 다시 수영장을 보면 묘한 대비가 생긴다.
바다는 자연의 여름이고, 수영장은 사람이 만든 여름이다.
그런데 그 둘이 속초에서는 어색하지 않게 이어졌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물 튀는 소리, 젖은 바닥에 닿는 슬리퍼 소리.
그날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달력은 5월이었지만, 속초는 이미 여름이었다.
■ 속초의 매력은 '많다'가 아니라 '겹친다'에 있다
▲속초의 매력은 하나의 풍경으로 끝나지 않는다. 호수, 산, 바다, 항구, 시장, 해변, 갯배가 짧은 동선 안에서 겹쳐진다. 사진=박철성 기자
속초 여행의 매력은 갈 곳이 많다는 데만 있지 않다.
겹친다는 데 있다.
영랑호에서는 호수와 바다와 도시가 겹친다. 여기에 울산바위까지 들어온다. 설악항에서는 관광과 노동이 겹친다. 동명항 포차거리에서는 밤과 바다가 겹친다. 갯배에서는 현재의 체험과 실향의 기억이 겹친다. 중앙시장에서는 먹거리와 생계가 겹친다. 해수욕장에서는 휴식과 계절이 겹친다.
속초는 그래서 쉽게 소비되지 않는다.
사진 한 장으로 끝나는 도시가 아니다. 하루 자고 떠나도 장면이 여럿 남는다. 바다만 보고 왔다고 하기에는 호수가 남고, 호수만 보고 왔다고 하기에는 울산바위가 남는다. 시장만 다녀왔다고 하기에는 항구가 남고, 갯배만 탔다고 하기에는 그 안의 시간이 남는다.
1박2일은 짧았다.
하지만 속초는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얼굴을 보여줬다.
바다는 젊었고, 항구는 묵직했고, 시장은 뜨거웠고, 갯배는 조용했다. 해변은 이미 여름의 문을 열었고, 수영장은 달력보다 먼저 계절을 앞질렀다. 울산바위는 그 모든 장면 뒤에서 속초의 다른 표정을 붙잡고 있었다.
■ 돌아오는 길, 속초는 뒤에 남지 않았다
▲속초에서 돌아오는 길. 버스 창밖으로 다시 산과 터널이 이어졌지만, 영랑호와 항구, 갯배와 해변의 장면은 쉽게 뒤로 밀리지 않았다. 사진=박철성 기자
돌아오는 버스 창밖으로 터널 입구가 다시 나타났다.
속초로 갈 때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바다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돌아올 때는 반대였다. 터널을 하나 지날 때마다 바다가 조금씩 멀어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속초는 멀어지지 않았다.
영랑호의 잔잔한 물빛.
그 너머로 솟아 있던 울산바위.
설악항의 짭조름한 바람.
동명항 포차거리의 불빛.
갯배 위의 짧은 침묵.
중앙시장의 뜨거운 냄새.
속초해수욕장의 흰 파도.
그리고 5월 수영장의 반짝이는 물빛.
그 모든 장면이 한 문장으로 모였다.
속초는 벌써 여름이었다.
이번 1박2일은 관광보다 확인에 가까웠다. 여름은 달력에 맞춰 오지 않는다는 것. 어떤 도시는 계절보다 먼저 계절을 시작한다는 것. 속초가 그랬다.
분당에서 출발한 버스는 속초에 닿았다.
하지만 여행이 데려간 곳은 단순히 동해안의 한 도시가 아니었다.
봄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여름을 열어젖힌 도시.
호수와 산과 바다를 한꺼번에 보여준 도시.
그곳이 속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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