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전 구독 시장 규모 100조원 돌파
삼성·LG·코웨이·청호나이스 등 경쟁 가속
소비자원 접수 관련 피해 2624건 ‘증가세’
가전 구독 관련 이미지.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천지일보=황해연 기자] 과거 냉장고와 세탁기 위에 붙어 있던 ‘일시불 가격 350만원’ 같은 큼지막한 문구는 자취를 감추거나 구석으로 밀려났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제휴 카드 사용 시 월 구독료 4만 9000원’이라는 안내판이었다.
매장 곳곳에는 ‘가전 구독·렌탈 전용 상담 데스크’가 별도로 마련돼 있고 전담 상담사들은 고객들에게 일시불 구매보다 구독의 이점을 설명하느라 분주하다. 이처럼 가전 시장의 패러다임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판매’에서 고객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관계’ 중심으로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가전 구독 시장 규모는 2025년 말 100조원을 돌파한 것으로 추산된다. 경기 침체 장기화로 인한 구매력 저하와 ‘필요할 때만 최신 기능을 누리겠다’는 MZ세대의 소비 트렌드가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시장이 급성장하는 만큼 소비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장치는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전 시장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기업들의 전략도 새로워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AI 가전=삼성’이라는 공식을 구독 시장에 강력하게 이식했다. 2024년 말 공식 론칭한 ‘AI 구독클럽’은 단순 렌탈을 넘어 자사의 통합 연결 플랫폼인 스마트싱스(SmartThings)를 기반으로 고객 경험을 완전히 혁신했다.
인공지능(AI)이 냉장고 속 식재료의 유통기한을 실시간으로 알리는 것은 물론 세탁기의 세제 잔량을 파악해 최적의 시점에 소모품을 자동 배송하는 ‘능동적 케어’가 핵심이다. 삼성은 전 가전 라인업에 AI 기능을 기본 탑재함으로써 사용자와의 접점을 구독 서비스 내에 묶어두는 이른바 ‘락인(Lock-in)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LG전자는 가전 구독을 단순한 수익 모델이 아닌 기업의 핵심 정체성(Identity)으로 안착시켰다. 2025년 매출 약 89조 2000억원 중 구독 부문에서만 2조원이 넘는 매출을 달성하며 조주완 부회장이 선포한 ‘스마트 라이프 솔루션 기업’으로의 체질 개선의 성공을 증명했다.
특히 대형 가전인 워시타워, 냉장고 등을 중심으로 전문가의 주기적인 방문 관리와 부품 교체 서비스를 결합한 ‘고관여 구독 서비스’가 고소득층 및 맞벌이 부부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프리미엄 구독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코웨이는 인적 인프라인 1만 2000여명의 ‘코디(Cody)’를 앞세워 초밀착형 관리 서비스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슬립 및 힐링케어 브랜드인 ‘비렉스(BEREX)’를 통해 매트리스, 안마의자 등 고도의 숙련된 관리가 필요한 품목에서 우위를 점했다. 스마트 매트리스 구독 모델은 사용자의 수면 상태를 분석해 경도를 자동 조절하는 등 기술과 인적 서비스의 결합으로 렌탈 종가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청호나이스는 세계 최초 얼음정수기 개발 타이틀을 보유한 탄탄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고부가가치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 최근에는 대형 오피스, 카페, 병원 등 B2B(기업 간 거래) 구독 시장 점유율을 공격적으로 확대 중이다.
얼음정수기 기술의 정점인 ‘에스프레카페’ 등 프리미엄 라인업을 구독 모델로 전환하며 법인 고객들을 대거 흡수했다. 공기청정기와 비데 등 위생 가전 부문에서도 기업별 맞춤형 살균 케어 시스템을 도입해 차별화된 수익 구조를 확립했다.
교원웰스는 범용 가전보다는 소비자 개개인의 특화된 취향을 공략하는 전략으로 독자적인 팬덤을 구축했다. 가정용 식물재배기인 ‘웰스팜’ 구독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단순히 기기를 빌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달 유기농 채소 모종을 배송하며 ‘홈 가드닝’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구독 시장에 안착시켰다.
최근에는 펫 가전, 뷰티 기기 등 MZ세대의 니즈에 맞춘 세분화된 구독 패키지를 지속적으로 출시하며 라이프스타일 큐레이션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쿠쿠는 1인 가구 비중이 급증하는 인구 구조 변화를 가장 영리하게 활용하고 있다. 방문 관리를 부담스러워하는 젊은 층을 겨냥해 필터를 직접 손쉽게 교체할 수 있는 ‘셀프 관리형’ 제품 비중을 전체의 45%까지 끌어올렸다.
정수기 중심에서 벗어나 공기청정기, 펫 드라이룸, 인덕션 등 실용적인 소형 가전 구독 라인업도 대폭 강화했다. 관리 비용을 줄여 합리적인 가격대를 유지하면서도 성능은 놓치지 않는 ‘실용주의 구독 모델’도 주목할 만하다.
가전 구독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각광받고 있으나 시장이 커질수록 소비자 불만이 급증하는 등 이면에는 소비자 보호 문제가 뚜렷해지는 모양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2022~2025년 접수된 가전 구독 관련 피해구제 신청은 2624건에 달하며 매년 증가세다. 무엇보다 소비자가 계약 시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 정보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현행 규정은 월 이용료뿐만 아니라 전체 계약 기간 지불해야 할 ‘총비용’과 ‘일시불 판매 가격’을 명시하도록 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코웨이, 쿠쿠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관련 정보를 성실히 제공하는 반면 LG전자는 정수기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한 대형 가전 상당수에서 총비용 정보를 누락해 소비자가 실제 부담액을 객관적으로 비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중도 해지 시 발생하는 ‘위약금 폭탄’ 역시 소비자의 발목을 잡는 요소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은 위약금을 잔여 임대료의 10%로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이 기준이 무색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해지 시점에 따라 위약금을 차등 부과하며 코웨이와 쿠쿠는 품목별로 최대 30%에 달하는 위약금을 설정하고 있다. 실제 설문 결과 응답자의 30% 이상이 이러한 구체적인 위약금 조건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 계약이 일반적인 구독 서비스의 특성상 사후 서비스(AS) 대책이 부실하다는 점도 불안 요소로 지적된다. 부품 단종 등 수리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삼성전자는 비교적 구체적인 조치 방안을 명시하고 있으나 LG전자와 코웨이, 쿠쿠 등은 명확한 보상 기준이나 대체 방안을 안내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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