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세계의 시, 시의 세계]식당

이들은 우리 집 가구에 영혼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아요.

[세계의 시, 시의 세계]식당

빛바랜 장롱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대고모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

장롱은 이런 추억을 충실히 간직합니다.

장롱이 말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나는 장롱과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지요.

(중략)

오래된 찬장도 있습니다.

그 안에는 밀랍, 잼,

고기, 빵 그리고 익은 배 냄새가 나지요,

이건 어떤 물건도 훔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충직한 일꾼이지요.

우리 집에는 여자건 남자건 많은 손님이 다녀갔지요.

이들은 우리 집 가구에 영혼이 있다는 걸 믿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방문객이 집 안에 들어서면서

나 혼자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잠 씨,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물을 때 빙긋 웃지요.

- 프랑시스 잠(1868~1938)

프랑시스 잠은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서 그립고 아름다운 존재로 릴케와 나란히 호명된 시인이다. 이 네 시인은 작고 가난한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맑고 소박한 언어로 노래했다는 점에서 친연성이 높다. 피레네 지방의 시골 마을에 살았던 프랑시스 잠은 당시 상징주의적 관념성이 유행하던 파리의 문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시에서는 일상의 구체적 사물이나 목가적 자연이 영혼을 지닌 존재로 되살아난다. 자신의 집에 있는 “빛바랜 장롱”과 “나무로 만든 뻐꾹 시계”, “오래된 찬장”을 기리는 이 시도 그렇다. 이 물건들은 단순히 식당에 놓인 가구가 아니다. ‘나’는 선조들이 그랬듯이 “추억을 충실히 간직”해온 “빛바랜 장롱”과 이야기를 나눈다. “나무로 만든 뻐꾹 시계”는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고, “오래된 찬장”은 식재료를 지키는 “충직한 일꾼”이다. 사물들의 충직함만큼이나 ‘나’의 태도 또한 겸손하고 대화적이다. 시인은 그 비인간 존재들과 더불어 낡아가며 자기만의 빛을 품는다. 그러나 그 집에 드나드는 손님들은 가구에 영혼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잠 씨, 어떻게 지내세요?” 인사하며 들어서는 그들은 시인의 애니미즘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