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함은 비열한 사람의 통행증,
고상함은 고상한 사람의 묘비명.
자 봐라, 저 도금된 하늘에는
죽은 자들의 거꾸로 비틀린 그림자가 가득 휘날린다.
빙하기가 지났는데,
왜 도처에 얼음 덩어리인가?
희망봉은 발견되었는데,
왜 사해에는 수많은 돛들이 서로 경쟁하는가?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종이와 밧줄과 그림자만 가져왔다,
심판을 받기 전에,
판결받을 목소리를 먼저 낭독하기 위해:
너에게 고하노니 세계여,
나는 ―믿지―않아!
너의 발 아래 1천 명의 도전자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렇다면 나를 천한 번째 도전자로 삼아다오.
(후략) - 베이다오(1949~ )
베이다오(北島), ‘북쪽섬’이라는 뜻의 이 필명은 내성적이고 고독한 기질을 말해주는 동시에, 톈안먼 사건 이후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해외를 떠돌아야 했던 시인의 운명을 함축하고 있다. 문화대혁명기에 건설현장 노동자로 하방(下放)될 무렵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국가 이데올로기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탐구해왔다. 베이다오가 주도했던 ‘몽롱시’는 정치적 트라우마를 겪으며 외국시를 지하에서 돌려 읽던 그룹으로, 중국 문단의 새로운 시풍으로 등장했다. 시가 체제에 복무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문학적 저항이기도 했다. ‘대답’이라는 시에서도 시인은 세계를 향해 단호한 어조로 “나는―믿지―않아!”라고 선언한다. 그의 시는 정치체제에 대한 불신과 언어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보여준다. “저 도금된 하늘” 너머 “죽은 자들의 거꾸로 비틀린 그림자”를 바라보며 시인은 탄식한다. “빙하기가 지났는데,/ 왜 도처에 얼음 덩어리인가?” “비열함은 비열한 사람의 통행증,/ 고상함은 고상한 사람의 묘비명”이라는 구절을 읽으면서는, 왜 역사는 고상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비열한 자들을 활보하게 하는지 되묻게 된다. 그런 현실 속에서 “천한 번째 도전자”가 돼야 한다면 그건 어떤 길일까. 50년 전 청년 베이다오의 시를 거울처럼 꺼내 다시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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