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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색’을 되찾은 대한제국 황실 가족…사진 속 탁자는 왜 사라졌나 [사소한 발견]

특히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서 태조 어진 원본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큰 도움이 됐다... 이후 보존과학 전문가인 박지선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대표의 배접지 분리 조사에서 어진의 앞면뿐 아니라 뒷면에도 금박과 석채가 발라져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이처럼 보존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그의 어진 모사도 단계별로 발전해 왔다...

강혜란의 사소한 발견

1922년 4월 28일 창덕궁 대조전에 모인 대한제국 황실 가족사진. 왼쪽부터 덕혜옹주(1912~1989),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순정효황후 윤씨 (1894~1966), 순종(1874~1926), 영친왕 이은(1897~1970), 그리고 시종관 품에 안긴 갓난아이 이진(1921~1922)이다. 영친왕(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 일본에서 결혼식 후 2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와 순종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린 근현례(覲見禮) 직후 찍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광복절 아침에 보면 새삼스러운 흑백사진이 한 장 있다. 1922년 4월 28일 창덕궁 대조전에 모인 대한제국(1897~1910) 황실 가족사진이다. 영친왕 이은(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 일본에서 결혼식 후 2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와 순종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올린 근현례(覲見禮) 직후 찍었다. 뒤로 황실 커튼이 우아하게 늘어진 가운데 탁자를 앞에 두고 여섯 사람이 섰다.

왼쪽부터 덕혜옹주(1912~1989),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 순종(1874~1926), 영친왕 이은(1897~1970), 그리고 시종관 품에 안긴 갓난아이 이진(1921~1922)이다. 사진 속 아이 이진은 이로부터 한 달이 지나지 않은 그해 5월 세상을 떠난다. 순종도 4년 뒤인 1926년 눈을 감았고, 영친왕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1963년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망국 12년, 형식만 남은 황실이 마지막으로 온전한 모습을 갖췄던 순간이 이렇게 한 장의 흑백사진으로 남았다.

지금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시실에 가면, 이 사진 속 인물들이 되살아난 듯한 대형 인물화를 만날 수 있다. 권오창(78) 화백이 1995년 전통 인물화 기법으로 비단에 채색한 ‘대한제국 황실 가족’(세로 200㎝X가로 600㎝)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흑백사진에선 누가 무슨 옷색깔인지, 옷깃과 치맛단에 어떤 무늬가 놓였는지 가늠할 길 없고, 발끝은 탁자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권 화백의 인물화엔 중앙의 탁자가 없다. 덕분에 이들의 치맛자락과 신발까지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이 9월 27일까지 기획전시실 Ⅰ·Ⅱ에서 특별전 ‘우리 옷을 그리다: 권오창 화백 기증 복식인물화’를 연다. 사진은 권오창 화백이 1995년 그린 대한제국 황실가족. 왼쪽부터 당의와 대란치마 차림의 덕혜옹주, 9등 적의를 갖춘 영친왕비, 12등 적의를 입은 순정효황후가 서 있다. 적의는 왕실 여성의 가장 높은 예복으로, 꿩무늬의 줄 수가 등급을 나타낸다. 황후는 열두 줄, 황태자비는 아홉 줄을 둘러 위계를 나누었다. 가운데에 황제의 예복인 통천관에 강사포를 갖춘 순종 황제가 서 있고, 그 곁에 홍색 곤룡포 차림의 영친왕이 있다. 오른쪽 끝에는 조복(朝服) 차림의 시종관이 이진 왕자를 안고 있다. 사진 국립대구박물관

지난 6일 박물관에서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권 화백은 가장 아끼는 전시작 가운데 하나로 이 작품을 꼽았다. 처음 봤을 때 마음이 무거워졌던 이 사진 속 인물들에게 선명한 색을 되찾아주면서 과감하게 탁자도 치워버렸다. “영친왕비와 순정효황후 옷이 어떻게 다른지, 순종은 강사포(絳紗袍) 아래 어떤 신을 신었는지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색과 무늬를 어떻게 고증할 것인가. 원판 컬러사진이 없는 상태에서 실제 남은 유물을 찾아 대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순정효황후가 입은 12등 적의는 세종대박물관이 소장 중이었고 권 화백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관련 특별전에서 처음 접했다. “화려한 색과 문양을 직접 보고 나니 저 옷을 입었을 때 사람의 모습이 어떨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인물 한 명 한 명의 옷, 신발, 장신구를 확인하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

지난 6일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열린 '작가와의 대화'에서 권오창 화백이 '대한제국 황실 가족' 인물화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강혜란 기자

탁자를 걷어내고 난 바닥도 문제였다. 사진상으론 서양식 카펫이 깔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그랬을까? 권 화백은 결국 창덕궁 대조전을 찾아가 담당자에게 직접 물었고, 카펫이 아니라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자리라는 답을 들었다. 뒤의 커튼 색깔도 확인했다. “1897년 대한제국부터는 황룡포를 비롯해 황색이 상징 컬러였기에 커튼도 황색으로 많이 했다고 들었다.” 과감하게 황색으로 표현한 커튼은 훗날 창덕궁 복원·고증 과정에서 사실로 확인됐다.

권 화백은 반세기 넘게 표준영정과 인물화를 그려 온 화가다. 정부표준영정 100여 점 가운데 17점이 그의 작품으로, 설총·김부식·이지함·단종 등 역사 인물을 고증에 따라 복원했다. 그는 표준영정을 그릴 때도 복식을 온전히 보여주는 데 전념했다. 태조·영조 어진을 모사하면서, 원본에선 앉은 모습을 선 자세로 바꿔 그린 것도 같은 이유다.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그의 어진 5점(태조·단종·영조·철종·고종)도 모두 입상이다.

태조 어진. 사진 국립대구박물관

권오창 화백이 그린 태조 어진. 원본과 달리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 복식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사진 국립대구박물관

권 화백은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국보)을 여러 차례 모사하며 전통 초상화 기법을 몸으로 익혔다. 1872년 제작된 이 어진을 127년 만인 1999년 처음으로 모사했고 이 외에도 여러 차례 태조 어진을 모사해 총 8점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처음엔 미처 몰랐던 기법을 나중에야 적용하기도 했다.

특히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서 태조 어진 원본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큰 도움이 됐다. 눈으로만 가늠해 온 색이 실제로는 어떤 안료였는지 밝혀진 것이다. 이후 보존과학 전문가인 박지선 정재문화재보존연구소 대표의 배접지 분리 조사에서 어진의 앞면뿐 아니라 뒷면에도 금박과 석채가 발라져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권 화백은 “아무리 금색을 표현해도 그런 은은함이 나오지 않아서 이상했는데, 알고보니 뒷면까지 금박지를 다 붙인 것이었다”며 우리 전통 초상화의 정교함에 찬탄을 보냈다. 이처럼 보존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그의 어진 모사도 단계별로 발전해 왔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영조 어진. 사진 국립대구박물관

권오창 화백이 그린 영조 어진. 원본과 달리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 복식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사진 국립대구박물관

그의 인물화를 보면 색채는 화려한 대신 어딘가 평면적인 느낌이다. 실제로 그 어디에도 그림자가 없어 입체감을 최소화했다. 권 화백도 초창기엔 인체를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어 음영을 넣기도 했지만 전통 기법은 그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불필요한 선이나 명암 없이 조명이 눈빛에 골고루 퍼져 있는 게 중요하지, 그림자가 있어서 뚜렷하고 입체감이 나는 게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국보로 지정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1710)을 보더라도 의자도, 소품도 없이 얼굴만 그렸을 뿐인데 인물의 신분과 성격, 시대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고 하면서다. 서양 초상화가 배경과 명암으로 입체감을 쌓아 올린다면, 동양의 전통 인물화는 절제된 선 몇 가닥으로 인물의 본질을 압축해 보여준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대한제국 황실 가족 인물화에서 탁자를 지우고 색과 무늬를 되살리면서도, 정작 인물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권 화백은 2025년 6월 조선시대부터 대한제국에 이르는 복식인물화 155건 168점을 국립대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를 계기로 마련된 특별전 ‘우리 옷을 그리다: 권오창 화백 기증 복식인물화’는 9월 27일까지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시실 Ⅰ·Ⅱ에서 열린다. 9월 3일에는 기획전시실 Ⅱ에 전시된 대작 ‘백진복도’를 주제로 두 번째 작가와의 대화가 예정돼 있다.

국립대구박물관이 9월 27일까지 기획전시실 Ⅰ·Ⅱ에서 특별전 ‘우리 옷을 그리다: 권오창 화백 기증 복식인물화’를 연다. 사진은 권오창 화백이 그린 '백진복도'. 100여 가지 어린이 복식을 한 화폭에 담은 대작이다. 사진 국립대구박물관

용어사전

사소한 발견

문화예술 곳곳의 사소하지만 의미심장한 뒷얘기들을 이따금 연재합니다.

‘꿩무늬 9줄’ 황태자비 9등 적의는 어떻게 환수됐나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국가민속문화유산 ‘영친왕 일가 복식 및 장신구류’(333점)는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이방자, 두 아들 진·구 왕자가 실제 착용했던 곤룡포·익선관·옥대부터 적의·원삼·당의, 장신구까지를 아우른다. 이 가운데 적의는 왕실 여성의 가장 높은 예복으로, 꿩무늬의 줄 수가 등급을 나타낸다. 황후는 열두 줄, 황태자비는 아홉 줄을 둘러 위계를 나누어 영친왕비는 9줄 적의를 입었다. 이 유물이 지금 자리에 놓이기까지는 4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영친왕비 궁중대례복 중 적의(翟衣). 적의는 왕비의 상징을 보여주는 명복(命服)으로 책비의(?妃儀), 친영의(親迎儀), 동뢰연(同牢宴)에 입은 법복이다. 적의에는 친애와 해로를 상징하는 꿩무늬를 함께 직조하였으며, 가슴, 등, 양 어깨에는 조선시대 왕족이 착용하던 금실로 수놓은 용무늬 보(補)를 덧붙었다. 1921년 일본에서 영친왕이 이진(李晉)을 낳고 1922년 귀국을 했을 때, 순종과 순정효황후를 처음으로 알현하는 근현례(覲見禮) 날 종묘 참배 시에 입었던 의례복으로 추정된다. 왕비의 예복은 신발부터 관모와 머리장식에 이르기까지 엄격하게 정해진 법식에 따라 제작되고 착용되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광복 후 일본 황족의 지위를 잃은 영친왕 일가는 일본에서 생활이 넉넉지 않았다. 왕실 복식과 장신구를 직접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이를 1956년 도쿄국립박물관에 위탁 보관했고 이듬해인 1957년 기증 형식으로 넘겼다. 1963년 영친왕 부부가 마침내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유물은 도쿄국립박물관 수장고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환이 본격화한 건 1988년부터다. 당시 창덕궁 낙선재에 살고 있던 이방자 여사가 협조하면서, 한국 문화재관리 당국이 도쿄국립박물관에 반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곧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9년 4월 30일 이방자가 세상을 떠났고, 실무 협의는 계속됐다.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가 정상급 의제로 다뤄졌다. 1991년 4월 양국 정부는 ‘영친왕비(고 이방자 여사)로부터 유래하는 복식 등의 양도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 간의 협정’을 체결했다. 일본 정부가 목록에 담긴 유물을 대가 없이 한국 정부에 양도한다는 내용으로, 엄밀히 말하면 ‘기증’이 아니라 정부 간 협정에 따른 무상 양도이자 환수였다. 그해 10월 유물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2009년 12월 333점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265호로 일괄 지정됐다.

1956~57년 도쿄국립박물관에 위탁·기증

1963년 영친왕 부부 영구 귀국 (유물은 일본에 남음)

1988년 한국 정부, 이방자 협조 얻어 반환 추진

1989년 4월 30일 이방자 별세

1990년 5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반환 문제 논의

1991년 4월 한일 정부 간 양도 협정 체결

1991년 10월 유물 국내 반환

2009년 12월 중요민속자료 제265호 일괄 지정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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