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승부처가 미세 공정 경쟁을 넘어 ‘두께 표준’으로 옮겨가고 있다.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가 차세대 HBM의 물리적 두께 규격을 완화하는 방안을 논의하면서, 메모리 업계의 수율과 제조 비용, 패키징 기술 도입 시점까지 함께 흔들 수 있는 변곡점이 형성되고 있다.
이번 논의의 핵심은 HBM4E와 HBM5 세대에서 패키지 전체 두께 상한을 얼마나 높일지에 있다. 현재 업계에서는 825㎛와 900㎛ 수준이 유력 시나리오로 거론된다. JEDEC에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같은 메모리 업체뿐 아니라 인텔, TSMC, 엔비디아, AMD 등도 참여하고 있다. 표준이 흔들리면 메모리 제조사와 팹리스, 파운드리 간 상호운용성도 함께 흔들린다. 결국 이번 논의는 단순한 치수 조정이 아니라 향후 수년간 AI 반도체 공급망의 효율과 방향을 정하는 기준선에 가깝다.
HBM이 점점 두꺼워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AI 시대의 프로세서는 연산 성능이 급격히 높아졌고, 이에 맞춰 메모리는 더 많은 데이터를 더 빠르게 공급해야 한다. 그러나 프로세서 인근에 배치되는 니어 메모리는 수평으로 넓히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 결국 좁은 면적 안에서 용량과 대역폭을 동시에 확보하려면 D램을 위로 쌓는 적층 구조 외에는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 HBM3가 12단 수준이었다면 HBM4는 16단, HBM4E는 20단까지 적층 가능성이 거론된다. 적층 단수가 늘수록 패키지 두께 증가는 피할 수 없는 결과다.
문제는 전체 패키지는 두꺼워지는데 개별 다이는 오히려 더 얇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HBM3E 8~12단의 단당 평균 두께는 약 60~90㎛ 수준이지만, HBM4 12~16단에서는 48~65㎛, HBM4E 20단에서는 41~45㎛까지 줄어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업계는 다이 뒷면을 깎는 박막화 공정과 범프 높이·간격 축소로 대응해 왔다. 그러나 20단 적층 구간에 접어들면서 이 방식은 뚜렷한 물리적 한계에 맞닥뜨리고 있다. 다이를 지나치게 얇게 만들면 휨 현상과 파손 위험이 커지고, 범프 축소는 방열 공간을 줄여 발열 부담을 키운다. 기술을 더 밀어붙이기보다 규격 자체를 바꿔 제조 여건을 확보하자는 논리가 힘을 얻는 배경이다.
두께 표준이 어디로 정해지느냐에 따라 차세대 본딩 기술의 채택 속도도 달라질 전망이다. 만약 900㎛ 수준으로 상한이 완화되면 단당 두께와 다이 간격 확보에 여유가 생긴다. 이 경우 SK하이닉스의 MR-MUF, 삼성전자의 TC-NCF 같은 기존 TC 본딩 계열 기술로도 20단 적층을 이어갈 가능성이 커진다. 반대로 825㎛ 수준에 머물면 기존 본딩만으로는 제약을 맞추기 어려워 하이브리드 본딩 도입이 예상보다 빨라질 수 있다. 표준 수치 하나가 공정 로드맵과 장비 투자 방향을 가를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어느 시나리오에서도 공통 수혜 공정으로 CMP를 지목했다. CMP는 화학 슬러리와 연마 패드로 웨이퍼 표면을 나노미터 수준으로 평탄화하는 공정이다. 두께 완화가 이뤄져도 20단 적층을 위한 박막화 자체는 계속 필요하다. 적층 단수가 늘수록 CMP의 정밀도와 투입량도 구조적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하이브리드 본딩이 본격 채택되면 CMP는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구리 패드와 유전체를 직접 맞물리는 하이브리드 본딩은 접합면의 완전한 평탄성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결국 표준이 완화돼도 CMP 수요는 유지되고, 규제가 엄격해져 하이브리드 본딩이 빨라져도 CMP 수요는 오히려 더 커지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HBM 두께 완화 이슈를 단기 기술 논쟁이 아니라 장기 밸류체인 재편의 신호로 해석된다. HBM 적층 경쟁은 더 높게 쌓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더 안정적으로 식히고, 더 낮은 비용으로 양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JEDEC의 표준 논의는 그 압박이 기술의 영역을 넘어 제도와 규격의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차세대 AI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은 누가 더 얇게 만드느냐보다, 누가 두께 증가를 감당하면서도 수율과 열관리, 양산성을 함께 확보하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이다.
■ 필자인 한용희 그로쓰리서치 연구원은 투자자산운용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SBS Biz 방송에 출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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