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조강연
빌라하리 카우시칸 전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이 17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2026 경향포럼> 강연에서 중견국들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국제질서, 단수형 아닌 복수형”
현실 맞춰 실용주의적 사고해야
“한국 한번 더 번영 못할 이유 없어”
“우리는 국제질서를 단수형으로 생각하기보다 ‘국제질서들’이라는 복수형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다양한 조합을 결정하는 요인은 보편적 가치가 아닌 ‘이익’이 될 것이다.”
빌라하리 카우시칸 전 싱가포르 외교부 차관이 17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2026 경향포럼> 첫 번째 세션 ‘자유주의 질서는 끝났는가: 세력권 질서로의 회귀’에서 말했다. ‘정상 상태로의 회귀’를 주제로 한 강연을 통해서다.
카우시칸 전 차관은 유엔 주재 대사, 러시아 주재 대사 등을 역임하며 37년간 싱가포르 외교 정책을 이끈 국제관계 전문가다. 그는 냉전 이후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역사적 예외’였으며 현재 붕괴 중인 이 상태야말로 ‘정상’이라고 보고 있다.
카우시칸 전 차관은 국제관계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은 법이나 규칙이 아닌 ‘이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베테랑 외교 전문가인 그는 “대부분 국가가 규칙과 법을 준수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국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어떤 국가가 어떤 상황에서도 법과 규칙을 항상 준수한다고 약속한다면 그것은 무모할 정도로 낙관적인 국가”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다. 지역에 따라 정도가 다를 뿐 세계 대부분 국가가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야만성’을 갖고 있으며, 국제질서란 규범이나 가치가 아니라 힘과 국익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카우시칸 전 차관은 국제질서를 향한 순진한 인식과 과도한 이상화가 전쟁을 포함한 여러 갈등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대표적이다. 그는 “유럽은 무모할 정도로 낙관적이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하지만 발칸전쟁을 겪은 뒤라면 그렇게 충격을 받아선 안 됐다. 그 전쟁에는 일부 유럽 국가들의 오판과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중견국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카우시칸 전 차관은 자유주의 질서가 예외였음을 인정하고 냉혹한 현실에 맞춰 실용주의적 사고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의 아시아 내 ‘역외 균형자’ 역할이 본질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미국과 가치가 아닌 이익을 기반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질서는 더 느슨하고 더 유동적이며, 더 절충적인 형태가 될 것”이라면서 “국가들은 특정 이슈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익에 따라 다양한 조합을 형성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질서를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미래를 비관할 필요 역시 없다고 했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번영했다. 환상 없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이 새로운 옛 세계(New old world)에서도 다시 한번 번영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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