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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브릿지 칼럼] 산업전환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1990~2000년대엔 반도체, 디스플레이가 무대 전면에 나섰고, 지금은 배터리, 바이오, 인공지능(AI)으로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60년 만에 완전히 다른 산업 포트폴리오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명제는...

[브릿지 칼럼] 산업전환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정책일반

[브릿지 칼럼] 산업전환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배포일

2026-04-12 13:43

수정일 2026-04-12 13:43

발행일 2026-04-13

19면

산업구조 재편, ‘추격‘의 문법을 버려야 할 때

정은미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 산업이 광복 이후 80년을 걸어온 길은 경이롭다. 1950년대와 비교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는 1만 배, 수출은 3만2000배, 1인당 GDP는 504배로 늘었다. 1960년대 저소득 국가군에 속했던 나라가 이제 세계 5대 제조 강국 반열에 올랐다. 세계은행이 “중진국 함정에서 탈출한 슈퍼스타”라고 표현한 것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찬란한 성적표를 들여다볼수록 불편한 질문이 따라온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근거로 자신하고 있는가. 과거의 성공 공식이 미래를 보장한다는 착각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제조업의 수출 구조 변천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다. 1960년대 섬유가 주역이었고, 1970~80년대에는 철강, 조선, 자동차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90~2000년대엔 반도체, 디스플레이가 무대 전면에 나섰고, 지금은 배터리, 바이오, 인공지능(AI)으로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다. “60년 만에 완전히 다른 산업 포트폴리오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명제는 단순한 자랑이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해체와 재구성의 역사를 뜻한다.

이런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역설적이게도 성공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때 세계 빅3였던 한국 섬유산업의 세계 시장 비중은 지금 1.8%에 불과하다. 디스플레이 세계 1위는 중국 기업에 추월당했다. 어떤 산업도 영속적 경쟁 우위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늘의 강점이 내일의 함정이 될 수 있다는 냉정한 인식이 산업 재편 전략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산업구조 재편을 바라보는 시각이 여전히 ‘추격자(fast follower)’의 문법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선진국이 개발한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원가 경쟁력으로 시장을 파고들며, 규모의 경제를 앞세워 지위를 확보하는 방식, 이 전략은 한국 산업이 성장하는 동안 탁월하게 작동했다. 모방과 역설계에서 출발해 라이선스, OEM을 거쳐 독자 개발에 이르는 기술 혁신의 경로도, 위기를 전략적 기회로 전환하는 도전 정신도, 분명히 한국 산업의 DNA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추격의 문법은 추격할 대상이 있을 때만 유효하다. 이제 한국이 서 있는 곳은 최전선이다.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모빌리티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다투는 한국 기업들 앞에는 더 이상 명확한 선도 모델이 없다. 스스로 답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즉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의 역량이 요구되는 국면에 진입한 것이다. 이 전환은 단순히 연구개발(R&D) 예산을 늘리거나 신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산업구조 재편과 전환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첫째, 개별 산업의 성패보다 산업 생태계 전체의 강건성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 산업의 경쟁력은 특정 기업이나 특정 업종에 있지 않다. 기초 소재에서 중간재, 부품·장비, 최종 조립재로 이어지는 산업 포트폴리오 전체가 클러스터로서 경쟁 우위를 형성해 왔다. 반도체만 강하거나 자동차만 강한 나라가 아니라,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소재, 부품, 장비 생태계가 함께 성장해 왔기에 대외 충격에도 복원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산업구조 재편 논의가 ‘어떤 산업을 키울 것인가’에 집중되는 동안, ‘어떤 생태계를 설계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뒷전으로 밀리는 경향이 있다. 순서를 바꿔야 한다.

둘째, 위기를 재편의 계기로 봐야 한다. 한국 산업은 1970년대 오일쇼크, 1990년대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매번 위기를 도약의 발판으로 삼았다. 오일쇼크는 중화학공업화를 촉진했고, 외환위기는 IT 산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탈탄소 전환과 디지털 전환, 공급망 재편과 기술패권 경쟁이라는 복합적 충격 역시 소모적 위기가 아니라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업그레이드할 기회로 읽고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바꾸어야 한다.

셋째, R&D 투자와 현장 혁신의 단절을 직시해야 한다. 1980년대 기업 연구소가 3000개 이상 설립되며 ‘기술입국’의 기치를 높였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막대한 R&D 자원이 투입되고 있다. 그러나 연구소에서 나온 성과가 생산 현장과 시장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단절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기술 개발과 사업화, 그리고 규모화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데 더 많은 정책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넷째, 대기업 중심의 구조에서 중소기업과 지역이 함께 성장하는 생태계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과거의 고속 성장은 대기업이 주도하는 수직적 산업구조 위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그 구조는 혁신의 다양성을 제한하고, 위험 분산 능력을 약화시킨다. 산업 생태계의 저변을 넓히는 것, 강소기업과 스타트업이 뿌리 내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단순한 형평성 문제가 아니라 가치사슬의 재구성과 융합화에 대응하는 국가경쟁력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 산업이 지나온 길은 “우리는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다른 길을 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그 성공의 문법을 기꺼이 해체할 수 있는 용기다. 산업구조 재편은 그 용기에서 시작된다.

정은미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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