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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사람들 "실패하면 처벌 받겠다" TDX 혈서로 시작...

그 씨앗은 이후 CDMA 세계 최초 상용화(1996), 와이브로, LTE, 5G, 6G, 그리고 현재의 초거대 AI 연구로 이어졌다. ◇ TDX 개발 주요 경과 1977 KTRI(ETRI 전신), 전자교환기 자체 개발 착수 1979 96회선 1차 시험용 교환기 제작...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사람들 "실패하면 처벌 받겠다" TDX 혈서로 시작...

[ETRI 50주년 특집 기획] TDX 개발과정

300여명의 연구진 밤낮 연구에 매달려

연구 동료를 넘어 동지, 가족으로 협력

전화 한 통 제대로 할 수 없는 나라에서

세계에서 10번째 전전자교환기 보유국으로

반세기 전, 정보통신기술 불모지 대한민국에 ICT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그 출발점에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가 있습니다. 많은 연구진이 밤샘하며 기술을 만들고, 그 기술을 산업으로 연결했습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통신·IT 강국으로 도약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50주년 기획은 '성과'가 아니라 그 이면의 선택과 사람, 그리고 국가적 결단의 기록을 따라갑니다. TDX에서 CDMA, 그리고 AI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ETRI의 50년을 다섯편의 기사로 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 편지]

전전자교환기(TDX) 개발사업은 연인원 1300여명, 예산 240억원 규모가 투입되는 당시에는 국내 최대 프로젝트로 연구소, 기업, 공무원 모두가 꼭 성공해야 한다는 각오로 시작됐다. 연구진은 "개발에 실패하면 모두가 처벌을 받겠다" 서약서를 써 놓고 연구에 참여했다. ETRI는 TDX 개발단 참여 연구진이 서약서를 쓰는 모습을 이미지화 했다.[자료= ETRI]

1961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82달러였다.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다. 전화기는 부의 상징이었고, 시내 전화 한 회선을 개통하려면 수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 가난한 나라에서, 1982년 국내 연구진들이 '세계에서 다섯 나라만 갖고 있는 기술'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총 예산 240억 원, 투입 인원 연인원 1300명. 기반 기술은 물론 없었다.

당연히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학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고 국회에서도 손을 내저었다. "그 돈으로 한강 다리 하나를 더 놓는 게 낫다"는 사회단체까지 있었다. 그런 속에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연구진이 전전자교환기 기술을 개발하겠다고 뛰어들었다. 실패하면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정부에 제출하고서 말이다. 일명 혈서로 당시 연구진이 어떤 심정으로 임했을지 짐작이 된다.

연구진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매달렸다. 그리고 5년 뒤, 한국은 세계 열 번째 전전자교환기 보유국이 되었다.

ETRI는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지난 1일 ETRI는 창립 50주년과 전전자교환기(TDX) 개통 4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당시 젊은 연구진은 이젠 백발성성한 70대의 원로가 돼 ETRI를 방문했다. 우리나라 ICT 기술개발의 포문을 연 전설들의 방문에 후배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대덕넷은 한국 ICT의 출발점이 된 그 뜨거운 시절로 돌아가 보았다.

◇ 혈서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전화 수요는 폭발했지만, 시설은 그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했다. 1961년 12만 대에 불과하던 가입 전화 수는 1970년 50만 대, 1975년 100만 대를 넘어섰다. 하지만, 공급은 언제나 수요의 한참 뒤에 있었다.

1972년 1만 건을 갓 넘던 전화적체 수는 1978년 60만 건으로 치솟았다. 전화를 신청하면 설치까지 1년 이상 기다리는 건 예사였다. 공중전화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전화기 품귀 현상으로 불법 뒷거래가 성행했고, 개인이 임의로 처분할 수 있는 '백색전화'는 당시 서울 시내 집 한 채에 맞먹을 만큼 가격이 치솟았다.

정부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1978년 벨기에 BTM사 전자교환기를 수입해 서울 영동·당산 전화국에 각 1만 회선을 설치했고, 1981년에는 미국 WEI사 교환기를 중앙·을지전화국에 4만 회선 추가했다. 그러나 전화적체는 해소되지 않았다. 외화는 계속 빠져나갔다. '교환기를 국산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사실, 국산화 방향은 이미 1976년 대통령 지시로 결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였다. 당시 전전자교환기 기술을 보유한 나라는 미국·영국·프랑스·캐나다·일본 등 선진국으로 손꼽던 5개국뿐이었다.

1982년, ETRI가 주관하는 'TDX-1(시분할 전전자교환기) 개발사업'이 공식 출발했다. 연구기간 5년, 총 예산 240억 원, 투입 인원 연인원 1300명. 당시 군 장비 개발 사업을 제외하면 10억 원대 프로젝트도 드물던 시절에, 240억 원이라는 금액은 그야말로 전례 없는 모험이었다. ETRI가 주도하고 금성반도체·대우통신·동양전자통신·삼성반도체통신 등 주요 민간 기업이 공동연구업체로 참여했다. 공기업이던 한국통신은 사업자로서 개발 비용을 지원했다.

반대는 거셌다. 기존 교환기 수입업체는 물론이고, 학회와 국회에서도 입을 모았다. 기반 기술도 없는 한국이 선진국보다 적은 연구비로 전전자교환기를 개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연구원 일동은 최첨단 기술인 시분할 전전자교환기의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만약 실패할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을 것을 서약한다."(서약서 전문)

"할수 없다"는 불신의 벽을 넘기 위해 ETRI 주요 보직자들이 꺼내 든 것은 서약서였다. 지금같으면 말도 안된다 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정부도 연구진도 성공해야한다는 절실함이 컸다.

TDX 국책사업의 씨앗을 뿌린 사람은 유완영 전 ETRI 교환연구부장(전 오리온전기 사장)으로 알려진다. 유 전 부장은 1981년 체신부가 농어촌지역 전화 보급 정책을 발표하고 향후 교환기를 전전자식으로 도입하겠다는 방향을 결정하는 시점에, 해외 제조사들과의 기술·가격 협상을 ETRI가 전담하게 되면서 결정적인 건의를 올렸다.

전전자교환기 개발이 심오한 원천기술이 아닌 데다, 확실한 수요처인 통신사업자가 존재하고 제조회사가 교환기를 생산해 사업화하면 국가 경제적으로 실익이 크다는 논리로 차관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차관은 ETRI에 계획서를 써보라고 지시했고, 그 계획서 한 장이 1981년 말 TDX 국책사업의 출발점이 됐다.

이후 300여 명의 연구원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매달렸고, 1984년 4월부터 서대전 전신전화국에서 TDX-1 실용 모델 실증에 돌입했다. 1986년 9월, 유 전 부장은 ETRI 대표로 청와대에서 국민훈장을 받았다. 계획서 한 장으로 시작한 일이 국가훈장으로 마무리되기까지 꼭 5년이 걸렸다.

◇ 20명으로 시작해 1300명의 군단을 만들다

ETRI 역사관 중앙에는 TDX, CDMA, DDRAM 개발에 참여한 연구진이 이름이 새겨진 서명판이 위치해 있다.[사진= 대덕넷DB]

TDX 개발의 현장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 박항구 소암시스텔 회장(전 ETRI 이동통신기술연구단장). 그는 TDX 개발단의 핵심 멤버로, 사업 초기부터 완료까지 전 과정을 관통한 증인이다.

박 회장에 따르면 사업 초기 규모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미국 벨랩(Bell Lab)이 1만 명을 투입하는 규모의 연구를 한국은 겨우 20명으로 시작했다. 기술 지식 확보부터가 문제였다. 당시 전자교환기 연구가 대학에서 활발하던 일본의 전자정보통신학회에 가입해 논문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후 특례보충역 제도를 통해 300명 가량의 연구인력을 추가로 충원했다.

인원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이번엔 속도가 문제였다. 300여 명이 팀별로 각각 개발한 내용을 합쳐야 하는데, 팀마다 진도가 달라 진도를 맞추려면 밤을 함께 새는 수밖에 없었다. 박 회장은 그 시절 동료들을 동지이자 가족이었다고 기억한다.

박 전 단장은 "밤샘이 허다했다. 300여 명의 연구원이 팀별로 개발한 내용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연구가 진행됐는데, 진행 속도가 제각각 달라서 진도를 맞추려면 밤을 같이 새야 했다"고 기억했다.

실제로 이 사업은 1982년의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ETRI의 전신 KTRI는 1977년부터 이미 차근차근 시험기를 만들어왔다. 1979년 96회선짜리 1차 시험기, 1980년 200회선 2차 시험기, 1981년 500회선 3차 시험기가 경기도 송전우체국에 설치되어 362명의 실제 가입자와 연결되어 시험 운용되었다. TDX-1 국책사업이 본격 시작된 1982년에는 이미 5년의 선행 연구가 쌓여 있었다.

◇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야전침대 100개와 밤샘의 기억

TDX 개발단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에릭슨으로부터 워크 메소드(개발방법론)를 전수받으며 300명이 각각 개발한 내용을 레고블럭처럼 맞춰가야 하는 방식이라, 밤샘 작업은 일상이었다. 자다가 자신 차례가 오면 나가서 실험하고 다시 들어와 잠을 청해야 했다.

박항구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TDX는 300명이 개발한 성과를 모아서 하나의 큰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낮에 연구한 결과가 모아지는 시점은 주로 저녁이었다. 그러다보니 밤샘을 하는 날이 많았다. 연구실에 아예 침대를 조금 과장해서 100개 정도 구입해 설치했다. 실패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아무도 힘들다는 말을 안했다. 이를 두고 과학계의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혹은 육사조직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당시 교환기 중계 회선 디지털화 개발을 맡았던 박권철 박사는 오류 하나를 잡기 위해 두 달 동안 밤샘하다시피 했다고 회상한다. 나중에 원인을 찾고 보니 황당했다. 아침마다 청소 직원들이 형광등 스위치를 일제히 올리는 순간, 순간적인 전압 강하가 발생해 시스템에 오류가 쌓였던 것이다. 그는 "과학기술과 산업발전에 한국의 전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담담히 말했다.

TDX 기구 설계를 맡았던 송규섭 박사(현재 에이팩 대표)도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는 "연구실에 실험용 중계국을 만들어 테스트하고 버그를 잡는데, 각자 개발한 것을 모아서 시스템으로 만들어 실험하는 상태라 참여진 모두 집에 가지 않고 연구소에서 숙식하며 기술 개발 시간을 줄였다"고 밝혔다.

부품 확보도 전쟁이었다. 통신용 부품은 40도 이상의 고온, 영하 15도의 저온에서도 견뎌내야 했고 40년 동안 고장이 없어야 했다. 희귀 부품은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회사를 통해 구매했고, 회로기판의 다층 생산이 국내에서 불가능해 일본에 건너가 직접 만들고 시험까지 해야 했다.

박항구 회장은 "부품인증센터를 만들어 국내 기업들에 TDX 부품 제작의 기회를 주고, 센터에서 품질을 인증받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국산화율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렸고, ITU-T 기준인 '40년에 2시간 이내 고장'이라는 신뢰도 목표도 달성할 수 있었다"고 난관 극복 기억을 밝혔다.

◇ 엔지니어의 혁신,  세계 어느 나라도 없던 '재발신' 기능

같은 시기, ETRI는 또 하나의 작은 혁명을 이루고 있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공중전화기에 넣는 일이었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시도하지 않은 방식이었다. 강철희 전 ETRI 통신시스템연구단장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강철희 전 단장은 국내에서 처음 개발한다는 말에 다들 회의적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그러나 소형 컴퓨터를 공중전화기에 넣으면 여러 종류의 주화를 처리할 수 있고 시내·외 통화를 동시에 지원하며 재발신 같은 새로운 기능도 얹을 수 있었다. 소신을 굽히지 않고 개발을 밀어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장 공들인 부분은 잔돈 처리였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의 공중전화기에도 거스름돈 기능은 없었다"면서 "그러나 엔지니어의 양심상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결국 100원을 넣고 통화를 마친 뒤 남은 금액이 있을 때, 다음 이용자가 재발신 키를 누르면 그 잔액을 쓸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짜 넣었다"고 밝혔다. 국제 규격도, 선례도 없는 기능이었다. 강 전 단장은 이 기능을 엔지니어로서 세상에 남긴 가장 보람 있는 일 중 하나로 꼽는다.

1983년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반 DDD 공중전화기 개발에 성공했다. 일본에서 수입하던 공중전화기가 150만 원대였는데, ETRI가 개발한 국산 공중전화기는 10원·50원·100원 동전 모두 사용 가능함에도 50만 원대에 제작이 가능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취재차 방한한 일본 NHK 기자가 이 공중전화기를 가리켜 "세계에 없는 휴머니즘적인 공중전화기"라고 소개했다. 한국의 기술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순간이었다.

◇ 가평의 천둥, 낙뢰, 그리고 다시 일어선 교환기

1986년 3월, 체신부는 경기도 전곡·가평, 전북 무주, 경북 고령에 각각 6,000회선의 상용 시스템을 공급했다. 그런데 가평에 설치된 전자교환기 시스템이 비오고 천둥치는 날이면 다 꺼져 버렸다. 각계에서 신뢰도 문제를 지적하며 비난이 들끓었다.

박항구 회장은 당시를 "개발단계보다 더 심한 맘 고생을 했다"고 기억한다. 연구진은 임시 출장소를 만들고 3개월간 가평에 상주하며 원인을 추적했다. 문제는 접지였다. 가평은 지역 특성상 철 성분이 많아 낙뢰 발생이 잦은 곳이었는데, 낙뢰 피해를 줄이는 접지 시공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연구팀이 원인을 찾고 문제를 해결했고, 이후 국내 모든 전자기기 접지 기준이 이때 마련되었다.

TDX 사업화에 참여했던 강병용 박사는 예산 확보 과정의 고마운 순간을 기억한다고 했다.

"계획서를 쓰고 체신부 담당 과장에게 보고하러 갔는데 그냥 말이 없더라. 그런데 다음날 담당이었던 신용섭 계장이 전화를 해왔고, 그 뒤로 우리가 올린 예산을 단 1원도 줄이지 않고 지원해줬다. KT의 하재연 과장도 위에서 예산을 깎으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다. 덕분에 연구자들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1가구 1전화'를 열고, CDMA의 초석을 놓다

1986년 TDX-1 교환기가 농어촌용·중소도시용으로 국내에 대량 공급되면서 한국은 세계 열 번째 디지털 전자교환기 개발국이 됐다. 이후 1987년 TDX-1A(1만 회선), 1989년 TDX-1B(2만 회선)를 연이어 개발해 마침내 '1가구 1전화' 시대를 달성했다.

1991년에는 TDX-10사업으로 대도시용 전자교환기를 개발해 서울 상계·천호전화국, 대전전화국, 북울산전화국 등에 총 6만2,000회선을 공급하며 국산 교환기 400만 회선을 돌파했다.

ETRI가 개발한 TDX 기술은 1984년 삼성·금성(LG)·대우·동양 등 기업에 거의 무상으로 이전됐다. 제품화와 생산은 기업들의 경쟁으로 이뤄졌다. 수백만 원에 거래되던 전화기는 일반 상품으로 가격이 떨어졌다. 각 가정마다 다이얼 전화기가 놓이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TDX의 진짜 유산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병용 박사에 따르면 CDMA의 85%가 TDX 기술이라 볼 수 있다. TDX 교환기가 이동통신망 상위에서 모든 기지국을 제어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1996년 세계 최초 CDMA 상용화의 씨앗은, 1982년 연구실에 야전침대를 들여놓던 그날 밤 이미 뿌려졌던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전전자교환기 TDX. 사진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TDX-1A, TDX-1B, TDX200만회선 개통, TDX-10. 이 기술은 이동통신 기술에 접목되며 우리나라를 통신강국에서 이동통신 종주국 반열에 올려 놓는다.[사진= ETRI]

◇ 불모지에서 씨앗이 자라는 방식

TDX 개발사업은 1978년부터 1993년까지 15년간 수행되며 연인원 3147명, 예산 1076억 원이 투입된 전무후무한 프로젝트로 기록됐다. ETRI의 50년사는 이렇게 평가한다.

"기계식·아날로그 교환기 단계를 거치지 않고 디지털 교환기를 자체 개발·생산한 국가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했다."

240억 원은 단순히 교환기 하나를 만든 비용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한 비용이었다. 혈서 같은 서약서를 쓰고, 20명으로 시작해 1300명의 팀을 만들고, 밤을 새워 부품 하나하나의 신뢰도를 끌어올린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항구 회장은 당시의 성공 요인으로 사람을 첫번째로 꼽았다. 그는 "15년간 진행된 TDX 사업 동안 중요 연구진의 이직이 없었다. 연구진 모두 우애가 끈끈했고 협력이 정말 잘 됐다. 지금 생각해도 감사한 시간이었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 씨앗은 이후 CDMA 세계 최초 상용화(1996), 와이브로, LTE, 5G, 6G, 그리고 현재의 초거대 AI 연구로 이어졌다.

◇ TDX 개발 주요 경과

1977    KTRI(ETRI 전신), 전자교환기 자체 개발 착수

1979    96회선 1차 시험용 교환기 제작 성공 (연구원 20여 명)

1980    200회선 2차 시험기 완성

1981    500회선 3차 시험기 — 경기도 송전우체국 설치, 362명 연결 시험

1982    대통령 지시 → TDX-1 국책개발 사업 공식 착수 (5년, 240억 원, 연인원 1,300명)

1983    TDX-1X 시험용 개발 완료, 용인 송전우체국 설치 현장 시험

1984    서대전 전신전화국 TDX-1 실용 모델 실증 개시

1986    개발 완료 — 국민훈장 수상 (청와대). 농어촌·중소도시 대량 공급 개시

1987    전국 전화 자동화 완성, TDX-1A(1만 회선) 개발

1989    TDX-1B(2만 회선) 개발 — '1가구 1전화' 시대 달성

1991    TDX-10 대도시용 교환기 개통, 국산교환기 400만 회선 돌파

1993    TDX 개발사업 완료 — 총 예산 1076억 원, 연인원 3147명, 경제효과 20조 원(2011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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