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빠르게 답을 얻어내는 시대에서, 우리는 사고의 과정을 생략하고 정답만 찾곤 한다. 하지만 자연은 다르다. 빠른 답보다 오랜 과정에서 나오는 해답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미생물의 생존 전략과 실패 과정이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남기는지 알려준다.
사진 프리픽
봄이 왔다. 날씨가 따뜻해지고, 매화가 피고, 목련과 벚꽃이 잇따라 터진다. 봄비가 내리고 나면 어디선가 익숙하고 포근한 냄새가 올라온다. 흙냄새, 혹은 봄내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냄새를 맡으며 ‘아, 봄이 왔구나.’ 하고 느낄 것이다. 그런데 미생물을 배운 사람이라면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아는 척할지도 모른다. “음~ 지오스민 냄새.”
생존을 위한 수천만 번의 시행착오
지오스민(Geosmin)은 토양 속 미생물인 방선균이 만들어내는 화학물질이다. 우리가 흔히 ‘땅냄새’라고 부르는 냄새의 정체이다. 미생물학 최고의 학술지《네이처》에 2020년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방선균이 지오스민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다. 지오스민 향기에 이끌려 ‘톡토기’라는 작은 토양 생물이 방선균을 찾아오는데, 이 과정에서 방선균의 씨앗인 포자가 토양 생물의 몸에 붙거나 배설물에 섞여 멀리 퍼진다. 우리가 낭만적으로 받아들이는 봄의 냄새는 사실 작은 미생물의 치열한 생존 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비옥한 토양 1g에는 10억 개 이상의 미생물들이 존재하며, 수백 종의 미생물이 한정된 공간과 영양분을 차지하기 위해 매 순간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인다. 방선균은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의 성장을 막는 항생물질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한 이 전략이, 훗날 인류를 살리는 항생제가 될 줄은 방선균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미생물학자 셀먼 에이브러햄 왁스먼은 항생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결핵 치료에 사용되는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해 의학의 판도를 바꿨다.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흥미로운 점은 이 항생물질이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방선균은 오랜 시간 동안 유전자를 레고 블록처럼 떼었다 붙였다 하는 ‘재조합’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무해하면서, 경쟁자만 정확히 타격하는 최적의 화합물을 찾기 위해 수천만 번의 유전적 시행착오를 겪은 것이다. 오늘날 병원에서 만나는 항생제는 작은 미생물이 오랜 동안 치열한 실험을 거쳐 성취한 생존의 산물이다.
영겁의 시간이 만든 위대한 발견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30년대 결핵은 ‘화이트 페스트’, 즉 하얀 죽음으로 불릴 만큼 치료제가 없는 죽음의 병이었다. 페니실린조차 결핵균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1932년, 세균학자이자 토양미생물 전문가인 셀먼 에이브러햄 왁스먼(Selman A. Waksman, 1888~1973) 교수는 미국 결핵협회의 의뢰로 결핵균 관련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결핵균을 억제할 수 있는 물질을 찾기 위해 토양미생물을 체계적으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은 극적인 통찰의 순간이 아니라 지독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왁스먼과 연구원들은 약 1만 개의 토양미생물을 시험했다. 그중 항균 활성이 있는 후보를 1,000개로 좁혔고, 다시 100개, 그리고 최종적으로 10개까지 추려냈다. 그러나 그 10개마저 하나씩 무너졌다. 예를 들어 1940년의 액티노마이신은 독성이 너무 강했고, 1942년의 스트렙토트리신은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발현되는 지연 독성 때문에 쓸 수 없었다.
“수많은 실망이 뒤따랐고,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다.”
- 셀먼 에이브러햄 왁스먼
셀먼 왁스먼 교수와 조수들이 스트렙토마이신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 위키미디어 커먼스
실패를 하나씩 확인하고 축적한 끝에 1943년, 한 방선균으로부터 스트렙토마이신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결핵 치료제이다. 왁스먼이 그 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데에는 스승 할스테드 박사의 가르침이 있었다. “멈춰서 생각하라. 대중적인 유행에 휘둘리지 말고, 너만의 길을 찾아라.” 답이 나오지 않는 막막한 시간을 집요한 생각으로 채운 결과였다. 왁스먼은 그 공로로 195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대학에서 미래의 바이오 의약 전문가들을 훈련하고 있다. 학생들은 열정적이고 유능하다. AI를 활용해 데이터를 분석하고, 복잡한 정보를 빠르게 정리한다. 그 능력은 분명 경쟁력이다. 하지만 때때로 아쉬움을 느낀다. 문제를 받자마자 정답을 검색하고, AI가 내놓은 그럴싸한 결과를 자기 생각이라 믿어버리는 모습 때문이다. 그런 학생들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거나 논리의 이면을 조금만 깊게 질문하면 금세 답변이 막히곤 한다. 그 지식이 자신의 치열한 사고 과정을 통과하지 않은 채 ‘복사’된 것이기 때문이다.
AI는 우리에게 정답을 줄 수 있지만, 정답에 이르는 ‘사고의 근육’까지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사고는 정답이 없는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이다. 지루한 실패의 시간을 자신의 힘으로 통과하는 근육이다. 그리고 그 힘이 결국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깊이를 만든다.
나는 강의실에서 마주하는 제자들을 보며 이 위대한 발견의 역사가 결코 과거의 일만은 아님을 느낀다. 방선균이 수천만 번의 시행착오 끝에 항생물질을 만들어냈고, 왁스먼이 1만 번의 실패 끝에 스트렙토마이신을 찾아냈다. 둘의 공통점은 버텼다는 것이 아니다. 버티는 동안 끊임없이 생각했다는 점이다.
AI 시대에 진짜 경쟁력은 더 빠른 검색 능력이 아니라, 바로 ‘스스로 깊게 고민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봄내음을 맡으며 나는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답을 빌려오고 있는가,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
글쓴이 서성현
미생물 전공 이학박사 및 한국폴리텍대학 바이오캠퍼스 바이오배양공정학과의 교수이다. 미래의 바이오의약 인재를 양성하며 미생물 배양 공정 실무를 가르치고 있다. 기술적 전문성 전수를 넘어, 제자들이 사회라는 거대한 배양기 속에서 주체적이고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사고의 근육과 올바른 마인드셋의 가치를 교육 현장에서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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