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길 수필가
보라는 붉음과 푸름을 품은 색이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어우러져 화려함과 우아함을 상징하지만, 우울하다거나 암담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한낮의 빛보다 저무는 시간을 떠올리게 하여 열정과 동경 사이 어딘가에 스며있을 것만 같다. 보랏빛, 눈을 감고 가만히 떠올리면 낡은 일기장 속에 감춰진 옅은 그리움이 피어난다.
김천 연화지에 가면서 보라색 길을 만났다. 지나치게 색이 지워지고 낡아 재개발 지역일 거라 여겼다. 초록물이 질펀해진 연못 둘레길을 걸으며 원래 색의 의미가 곱씹어졌다. 결국 관광 안내판을 들여다보고 누군가의 소리길임을 알았다.
그가 노래 오디션에서 고전하며 이름을 얻기까지 마음 졸이고 지켜봤다. 그를 상징하던 색인데 금세 떠올리지 못한 건 화면에서 사라졌기에 잊혔다. 바래진 길이 마치 한 사람의 근황 같다.
그의 성장 환경이 텔레비전에 방영된 적이 있다. 인간적인 서사와 뛰어난 재능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데우기에 충분했다. 한 사람이 우뚝 서기까지 수많은 인연 고리가 있기 마련이라 질풍노도의 시기를 안아준 스승 이야기는 시대에 귀감이었다. 그 후 텔레비전 화면에 보랏빛 물결이 일 때면 함께 마음이 출렁거렸고, 유튜브에 그의 노래가 나오면 자연스레 하트를 눌렀다.
인기가 물밀듯이 치오를 즈음 팬들과 지자체는 진즉 소리길을 만들었다. 그의 삶이 지역에 자랑이고 마을 상징이 된다고 여겨서다. 그건 모두에게 따뜻한 일이지만 그새 본디 색을 잃어가니 아이러니하다.
길은 한때 환호와 사랑을 동경하는 보랏빛으로 출렁거렸다. 지붕이며 담벼락, 간판, 길바닥까지 그토록 환상적이다가 이젠 한 지역에 저무는 빛이 되었다. 그를 상징하는 물품 가게와 음식점도 문을 닫은 채 낡았다. 희끗한 빛으로 남겨진 길은 시간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자리 같다. 마치 인기 절정이던 한 사람의 고개 숙인 생에 고백을 보는 듯하다. 한때 수많은 발길로 북적이며 사랑을 나누던 길이 아닌가. 이토록 적막하게 퇴색된 걸 보면 팬들의 서운함마저 짐작된다.
'스타'라고 불리는 공인은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산다. 그런 사람에 도덕적 기만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추락의 기점일 수 있다. 노래는 여전히 남을지 모르지만 돌아선 마음을 이전으로 온전히 돌리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빛과 비바람에 씻겼다고 모두 등을 돌린 건 아닐 테다. 누군가는 여전히 그의 재능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다시 일어서기를 간절히 기도할지도 모른다. 길도 그걸 아는지 사람의 눈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의 이름으로 길을 만든다는 건 한 인격체의 인간미가 주는 의미를 내세워서가 아닐까. 관심이나 인기가 영원하다고 믿기보다 그를 보며 꿈을 이어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 길에서 현재를 딛고 일어서는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그걸 기억하여 팬들은 갈채를 보내고 그림자처럼 따르며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 위에 세워진 명성은 연약할 수밖에 없어 사랑의 부피만큼 실망에 대한 깊이는 더해질 수밖에 없다.
기억되는 건 무대에서 비추는 후광의 순간이 아니다. 한 사람에 삶의 태도이다. 화려한 조명 뒤에 얻게 될 불안감을 이해하기보다 진실함에 비례하여 의존하고 싶어진다. 박수의 대가처럼 이름과 품격을 기억하는 건 '스타'에 열광하는 자들의 몫인 것 같다.
퇴색된 길은 마음의 풍경화다. 쉽게 데워졌다가 쉽게 잊어버리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화려함 뒤의 그늘을 안아주기보다 배신감이 먼저 작용한 건가. 누구라도 바탕이 무너지면 오래 버티지 못함이 마땅하여 올라간 길을 내려서야 한다. 그게 인생이라 대중의 환호도 그 사람에 삶을 따라간다.
한때 그의 사랑은 세계를 이어 나갔다. 전력 질주하는가 싶더니만, 음주 운전과 사고 후 은폐 행각에…. 자신을 받쳐주는 사랑의 부피가 판단력까지 마비시킨 건가. 유튜브마저 사소한 잘못을 들춰 도마에 올려놓고 흔들었다. 물론 얼마 동안 대가를 치른 후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애초 진실을 마주했더라면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보랏빛의 환상에 젖어 응원할 텐데….
보라를 이루는 두 가지 색 중, 붉은색이 절정을 나타낸다면 푸른색은 희망이라 믿고 싶다. 빛나는 순간에도 그림자는 자랄 수 있고, 추락의 시간에도 꿈은 남아 있을 테니까. 어느 시인은 "존재하는 것, 모두 풍화된대도 '존재했던 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라 했다. 언젠가 닳고 사라지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는 남는다. 꽃은 시들어도 피어있던 때의 아름다움이 기억되듯이.
사람도 살아온 태도와 흔적을 남기듯이 소리길도 원래 존재했던 태도를 거뜬히 찾지 않을까. 마땅히 그의 삶도 다시 세워지리라. 그런다면 예전 발자국들이 모여 다시 환상의 물결을 이룰 테다. 희끗해진 보랏빛 길에서 아물어져가는 상처를 본다. 이명길 수필가
이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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