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질서 통째로 흔들려
규범해석 넘어 종합 대응나서
4월 16일(현지 시간) 미국 버지니아주 펜타곤에서 댄 케인 미 합참의장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AFP연합
#1 국내 석유업계 A 사는 4월 15일(미 현지시간)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이 러시아 및 이란산 원유에 대해 한시적으로 판매를 허용해온 ‘일반 면허(general license)’를 더 이상 갱신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곧바로 로펌에 자문했다. 미 재무부가 제시한 이란산 원유 거래 유예 조치 종료일인 4월 19일이 임박하면서, A 사는 해당일까지 계약만 체결하면 되는지, 선적·운송은 물론 대금 지급까지 모두 마쳐야 하는지 여부를 문의했다.
#2 국내 선사 B 사는 호르무즈 해협 운항과 관련해 보험사에서 아예 부보(附保·보험에 가입하는 일)해주지 않거나 보험료가 급등할 가능성에 대비해 로펌에 자문을 요청했다. 보험없이 운항하다 사고가 나면 손해를 전부 부담해야 하는 데다, 용선업체의 경우 보험 유지 의무를 규정한 대출 약정을 위반해 채무불이행(EOD)에 해당할 수 있어서다. 업계에서는 금융기관의 대출금 회수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이들 사례는 국내 로펌이 체질을 바꾸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협정 해석과 소송 대응에 집중하던 로펌들이 관료·산업 전문가를 배치하고, 산업 전략과 경제적 이해까지 결합한 종합 자문을 제공하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미국 중심의 경제안보 강화 기조 속에 관세·공급망·산업정책이 통상 질서의 핵심 변수로 떠오른 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 미국-이란전쟁까지 터지면서 체질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보호무역주의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글로벌 통상 환경 변화가 본격화됐다고 본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지원법(CHIPS Act),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조치가 잇따랐다. 여기에 미·중 디커플링과 공급망 재편까지 맞물리며 각국 규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자문 수요도 함께 늘었다는 분석이다.
정기창
법무법인 광장
외국변호사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시작된 경제안보 기조가 바이든 정부 들어 한층 정교해졌고, 관세, 공급망, 제조업 부흥을 위한 산업정책의 시행 등 미국의 조치가 통상 질서의 핵심이 됐다”고 말했다.
신동찬
(사법연수원 26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과거에는 WTO 중심의 다자규범 체제 아래 기업들이 협정 위반 여부를 주로 물었지만, WTO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고 미국의 자국 우선 관세·제재 정책이 강화되면서 기업 수요도 규제 대응과 공급망 확보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경제제재 조사 대응이나 재무부 특별허가 신청 수요가 크게 늘어난 것도 같은 흐름이라고 했다.
“정책 방향과 파급 효과까지 읽어야”
이 같은 ‘신통상 환경’ 속에서 로펌들의 자문 내용도 달라지고 있다. 특정 통상 조치가 위법한지 여부만으로는 기업에 실질적인 해법을 주기 어려워지면서다.
한창완
(35기)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제재, 수출통제, 투자심사, 공급망 재편 등과 같은 정책 수단이 통상 이슈와 하나의 패키지로 작동하고 있다”며 “법률 분석뿐 아니라 정책 방향과 산업 파급 효과까지 함께 읽어야 유의미한 조력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김세진
법무법인 세종
외국변호사는 “기업들에 지금 필요한 것은 맵핑(mapping) 능력”이라며 “글로벌 사업 지형도를 정확히 그려 어디서 리스크를 감수하고 어디서는 피할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핵심은 각국 정책이 어떤 규제로 구체화되는지 읽어내는 것”이라며 “한국 기업이 해외에 진출할 때 받을 수 있는 지원 역시 정책에서 나온다”고 했다. 결국 기회와 리스크는 같은 곳에서 생긴다는 설명이다.
대관·정책 조직으로 체질 변화
로펌은 이러한 상황에 맞춰 산업통상자원부·외교부·관세청·국세청 출신 인사와 산업 전문가를 영입하고, 전담 센터와 연구조직을 신설하고 있다.
최근
김·장 법률사무소
에는 미국 국토안보부 산하 관세국경보호청(CBP) 출신 존 레너드 전 무역부국장보가 합류했다. 법무법인 세종은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분쟁대응과장 출신 김세진 외국변호사를 영입해 통상산업정책센터를 신설하고 초대 센터장으로 선임했다. 2025년 9월에는
법무법인 화우
가 박진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영입했다. 한편 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으로 활동해온 김흥종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은 4월 17일 주영국대사로 임명됐다.
정책이 법과 규제로 구체화되기 전에 방향을 읽고 대응 전략을 짜려면, 정부 경험과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는게 로펌의 설명이다. 외국 정부와 협상해야 하는 사안도 늘면서 상대국 정책 기조와 한국 정부의 대응 방향을 함께 읽을 수 있는 관료 출신 전문가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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