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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반장님에서 아버지로, 다시 밥상 앞 이웃으로… 최불암이 남긴 자리

그는 누군가에게는 범인을 쫓던 반장님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저녁마다 만나던 아버지였다. 또 다른 세대에는 낯선 마을의 밥상 앞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손님이었다. 29일 별세한 배우 최불암의 67년 연기 인생은 몇 편의 흥행작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인이 오랫동안 믿고 바라본 어른의 얼굴

‘수사반장’의 정의·‘전원일기’의 가족·‘한국인의 밥상’의 삶

“연기자는 사회의식이 수반돼야”… 화면 밖 나눔으로 이어진 배우의 책임

그는 누군가에게는 범인을 쫓던 반장님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저녁마다 만나던 아버지였다. 또 다른 세대에는 낯선 마을의 밥상 앞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손님이었다. 29일 별세한 배우 최불암의 67년 연기 인생은 몇 편의 흥행작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한국인의 밥상’을 거치며 그는 한국인이 오랫동안 믿고 바라본 어른의 얼굴이 됐다.

◆젊어서부터 노인을 연기한 배우… ‘국민 아버지’에 가려진 폭

드라마 전원일기 때 김혜자와 최불암의 모습.

1939년 인천에서 태어난 최불암은 연극 무대에서 출발했다. 1959년 ‘햄릿’에 출연했고, 국립극단을 거쳐 1967년 방송에 진출했다. 배우 생활 초기부터 노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20대에 ‘수양대군’의 노년 김종서를 연기했고, 40대에는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80대 이승만을 맡았다. 자신의 실제 나이보다 인물의 세월을 먼저 살아내는 배우였다.

‘국민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의 대표 이미지지만, 연기의 전부는 아니다. 영화 ‘파계’, ‘영자의 전성시대’, ‘왕십리’, ‘최후의 증인’ 등 서로 다른 결의 작품에 출연하며 활동의 폭을 넓혔다. ‘달려라 만석아’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최후의 증인’으로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연기상을 받았다. 텔레비전의 친숙한 얼굴인 동시에 영화와 연극에서도 역량을 인정받은 배우였다.

그가 두 대표작에 붙인 표현은 자신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2007년 에세이에서 “‘수사반장’은 내 연기를 다진 초석 같은 작품, ‘전원일기’는 나를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비상시켜 준 빛나는 날개 같은 작품”이라고 회고했다. 한 작품은 배우로서의 기반을, 다른 작품은 대중과 맺는 관계를 넓혀준 셈이다.

드라마 전원일기의 한 장면.

◆박 반장과 김 회장… 시청자가 오랫동안 믿어온 얼굴

‘수사반장’의 박영한은 그를 정의를 지키는 인물로 각인시켰다. 1971년부터 1989년까지 이어진 작품에서 같은 인물을 오랫동안 연기하며 배우의 얼굴과 배역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경찰의 이미지를 높인 공로로 1972년 명예경찰에 위촉됐고, 2024년에는 민간인 최초로 명예 국가수사본부장이 됐다. 화면 속 역할이 현실의 상징으로 이어진 사례다.

수사반장서 박영한 반장 역할을 맡은 최불암.

‘전원일기’의 김 회장은 다른 방식으로 시청자 곁에 머물렀다. 사건을 해결하는 반장 대신 가족과 이웃의 문제를 함께 겪는 가장이었다. 22년 동안 이어진 방송에서 김혜자와 보여준 부부 연기는 실제 부부로 오해하는 시청자가 있을 만큼 익숙했다. 최불암은 이 작품을 통해 한 인물을 넘어 부모 세대의 얼굴로 자리 잡았다.

교양 프로그램인 '한국인의 밥상' 메인 진행을 맡은 최불암.

이후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배역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만났다. 2011년부터 14년간 전국을 누비며 음식과 그 음식을 만들어온 삶을 전했다. ‘전원일기’에서 농촌의 일상을 연기하던 배우가 실제 지역 주민의 이야기를 듣는 진행자로 옮겨간 것이다. 그의 방송 인생을 관통한 것은 화려한 인물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에 가까이 머무는 태도였다.

◆“연기자는 사회의식이 수반돼야”… 그가 말한 배우의 조건

최불암은 연기를 외형적 재현이나 인기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2008년 “연기자는 사회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 역할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투영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배우가 대본 속 인물을 움직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이 사회에 남길 의미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드라마가 자극과 재미에만 기울어지는 것도 경계했다. 2005년에는 “드라마가 재미만 추구하면 안 된다. 드라마로 쓴맛도 봐야지, 단맛만 봐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사랑과 배반 같은 말초적인 소재만으로는 감동을 만들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배역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경계심도 있었다. 2006년 ‘샘터’ 대담에서는 “한 인물의 배역이 끝나면 빨리 잊어버리고 타성적 연기와 관습적 캐릭터를 깨뜨려야 한다”고 했다. ‘수사반장’과 ‘전원일기’의 이미지가 강했던 배우가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일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무게가 남달랐다.

2014년 이후 드라마 활동에서 한발 물러난 이유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를 “은퇴가 아니라 물러남”이라고 설명하며, 제작진이 자신을 어려워해 연기에 대한 지적을 하지 않으니 발전이 없다고 느꼈다고 밝혔다. 원로라는 지위가 배우로서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자각이었다.

◆연기한 책임을 삶으로… 아동 후원으로 이어진 ‘아버지’

그의 사회공헌은 대표작과도 맞닿아 있다. ‘전원일기’에서 고아 금동이를 입양하는 이야기를 연기한 뒤, 화면 속 행동과 실제 자신의 삶을 돌아본 것이 아동 후원의 계기가 됐다. 1981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인연을 맺은 뒤 40여년간 어린이와 청소년을 돕는 활동을 이어갔다. 장례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장으로 치러지는 것도 이 같은 인연 때문이다.

그는 엄숙한 원로로만 남지도 않았다. 1990년대 ‘최불암 시리즈’ 속에서는 엉뚱한 농담의 주인공이 됐고, 특유의 ‘파하∼’ 웃음은 수많은 성대모사로 재생산됐다. 권위 있는 아버지의 얼굴과 거리낌 없이 웃음을 나누는 친근함이 한 사람 안에 공존했다.

최불암이 한국 대중문화에 남긴 자리는 바로 그 사이에 있다. 무게는 있었지만 멀리 있지 않았고, 오래 사랑받았지만 배우의 책임을 묻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반장님과 아버지, 밥상 앞의 이웃으로 이어진 그의 시간은 연예인이 대중의 신뢰를 어떻게 쌓고, 그 신뢰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복진 기자 b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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