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회

[박순웅의 삶을 회계하다] ⑲ 아주 오래전 장부

삼일회계법인과 대주회계법인을 거쳐 현재는 한미회계법인의 파트너 회계사로 회계감사와 경영자문을 수행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스타트업 30분 회계』, 『스케일업 30분 회계』가 있다.

[박순웅의 삶을 회계하다] ⑲ 아주 오래전 장부

삶의 기초잔액

[한국강사신문 박순웅 칼럼니스트] “나는 누구인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철학적인 물음 앞에 한동안 머물러 보아도 쉽게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답은 떠오르지 않고, 생각은 다시 제자리걸음입니다.

답을 찾아보고자 어린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초등학교 시절의 한 장면이 먼저 생각납니다. 형은 태권도 도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하얀색 옷 위에 둘러진 파란 띠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초등학생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필자는 하고 싶은 것과 갖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부러운 마음이 생겨도 조용히 바라보는 태도를 먼저 익혔는지도 모릅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도 아무 일 없는 듯 지나치고, 싫다는 말은 더더욱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습니다.  그 아이는 그저 말썽부리지 않고, 싸우지 않으며, 조용한 아이였습니다.

사람마다 어린 시절의 장부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기록됩니다. 어떤 아이는 마음껏 울며 감정을 표현했고, 어떤 아이는 필자처럼 울기 전에 괜찮다고 마음속으로 말하는 법부터 익혔습니다. 그렇게 저마다의 모습으로 우리 삶의 장부는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필자는 자신의 마음과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마음보다 역할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왔고, 어쩌면 삶의 거래를 장부에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채 지나왔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필자의 장부는 종종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불편함은 마음속으로 감당한 채, 자신의 권리를 쉽게 요구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기록되곤 합니다. 돌이켜보면, 오래전 침묵은 지금의 기록 방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회계에서는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어도 장부가 완전히 새로 출발하지 않습니다. 지난해의 숫자들은 다음 장부로 이어지고, 그 첫 기록을 기초잔액이라 부릅니다. 모든 장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숫자 위에서 시작됩니다.

삶도 어쩌면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지금의 자신이 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기록되어 온 장부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처음 기록된 장부가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말하지 못한 감정은 기초잔액으로 적힌 마음의 흔적입니다.

지금의 나를 함부로 결산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의 감정보다 관계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마음속으로 접어두고,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하루를 버텨냅니다. 왜 늘 불안한지, 왜 쉬어도 편하지 않은지. 지금의 삶은 오늘만의 결과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장부의 흐름 위에 놓여 있습니다.

“내 삶의 기초잔액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이제 질문을 조금 바꿔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대신, 내 삶의 장부는 처음에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오늘은 태권도 도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초등학생을 다시 만나봅니다. 그리고 조용히 한마디를 건넵니다.

“너의 장부를 응원할게.”

칼럼니스트 프로필

박순웅 칼럼니스트는 공인회계사로서, 기업의 재무제표를 분석하듯 삶을 구조적으로 해석하는 글을 쓰고 있다. 삼일회계법인과 대주회계법인을 거쳐 현재는 한미회계법인의 파트너 회계사로 회계감사와 경영자문을 수행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스타트업 30분 회계』, 『스케일업 30분 회계』가 있다.

주요

기사

박순웅 칼럼니스트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