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민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
셰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는 친구를 위하여 유대인 샤일록에게서 살 한 파운드를 담보로 돈을 빌린다. 안토니오는 자산이 배에 묶여 유동성이 부족하였는데, 이는 초기 상업자본주의 시대 금융업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또한 유대인에게 돈을 빌린 것은 오랫동안 기독교 사회가 성경의 이자 금지 규정을 문자적으로 지켜 왔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는 한편으로 금융업을 필요로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업자를 경계하는 모순 속에 살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베니스의 상인’의 시대와 종교개혁자 요한 칼뱅의 시대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칼뱅은 초기 상업자본주의 시대를 살면서 구약성경의 원리를 새로운 경제 현실 속에서 재해석한 사람이었다. 돈이 생산과 교환에 참여하는 역할을 인정하였고, 일정 조건 아래 이자와 대부업도 허용하였다. 그러면서도 돈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쳤다. 주식 투자 열풍의 시대에 칼뱅이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칼뱅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누리면서도 탐욕에 빠지지 않을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이를 오늘의 주식 열풍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 투자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가? 주식은 본래 기업의 성장과 자본의 순환에 참여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수익률이 삶의 의미가 되고, 계좌의 숫자가 안정감과 자존감을 결정하기 시작한다.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주가 등락 그래프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한 시간 예배도 견디지 못한 채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둘째, 없어졌을 때 고통받지 않으며, 많아져도 절제할 수 있는가? 사람이라면 주가가 하락할 때 가슴이 쓰리고, 올라갈 때 도파민이 분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절망하여 얼굴이 어두워지고 조바심낸다면, 또한 반대로 배당금을 두둑이 받았다고 방종한다면, 그의 영혼은 이미 나락에 빠진 것이다.
셋째, 나의 부요가 공동체를 살리고 공동선에 기여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는 이유는 이를 통하여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하라는 데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라고 배웠는데, 이는 성경적이지 않다. 기업의 목적은 재화를 창출하고 분배하며, 일자리를 마련하여 사회에 기여하는 데 있다. 그러니 물질 때문에 의가 상하거나, 과도한 경쟁으로 관계가 파괴되거나, 나아가 사회를 불안하고 불의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이러한 갈등이 이미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를 둘러싼 일들을 보라. 노조는 성과급 15%를 내놓으라고 하고, 주주는 노조가 주주에게 귀속되어야 할 이익을 선배당받는다고 소송을 걸었다. 회사 측에서는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하여 재투자해야 한다고 하고, 정부는 국가 경제가 흔들릴까 봐 노심초사한다. 주식을 한 주도 갖지 않은 일반 국민은 내 소비와 내 데이터의 무상 제공으로 성장한 빅테크기업을 씁쓸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아무쪼록 모처럼 찾아온 호재가 국민 분열이 아니라 함께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 바란다.
욕망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칼뱅에 따르면, 그렇게 사는 힘은 내세를 명상할 때 생긴다. 내세를 생각하는 사람은 주식에 투자할 수 있어도 희망까지 투자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참된 분깃은 수익률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편 73:25)
장동민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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