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무엇으로 싸우는가
에드워드 피시먼 지음 | 이성민 옮김
RHK | 884쪽 | 4만3000원
21세기 경제전은 석유와 달러, 공급망과 제재가 뒤엉켜 있다. 는 미국이 세계 경제의 ‘초크포인트’를 어떻게 무기로 활용해왔는지 추적한다. 로이터연합뉴스
달러 패권·제재·첨단기술 등
무기 삼아 ‘병목’ 겨누는 미국
숨통 조이는 ‘총성 없는 전쟁’
이란·러시아 제재 관련 업무
실무자가 풀어낸 현대 경제전
호르무즈 해협이 바다 위 주차장으로 변했다. 미국과 이란의 충돌이 격화하면서 해협 안팎으로 유조선과 LNG선, 화물선 수천 척의 발이 묶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러한 정체는 유가 급등과 물류 마비로 이어지며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다. 전쟁은 더 이상 미사일과 전투기만으로 치러지지 않는다. 석유가 지나는 길목, 돈이 흐르는 결제망, 첨단기술이 오가는 공급망을 누가 쥐고 흔드느냐가 승부를 가른다. 는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로 긴밀히 얽힌 세상에서 달러 패권, 경제 제재, 첨단기술을 ‘경제 무기’로 바꾼 미국의 외교 정책을 추적하는 책이다. 책의 원제인 ‘초크포인트’는 세계 경제의 흐름을 조를 수 있는 전략적 병목을 뜻한다. 호르무즈 해협을 틀어막고 세계 경제를 인질로 잡은 이란의 맞대응은 21세기 전쟁이 초크포인트를 둘러싼 경제전의 성격을 띤다는 이 책의 문제의식을 현실에서 보여준다.
저자 에드워드 피시먼은 경제 제재 전문가다. 버락 오바마 1기 때인 2011년 공직에 입문해 미 국무부·재무부를 거치며 대이란 제재 정책과 러시아 제재를 담당했다. 그는 경제 제재에 직접 가담했던 경험과 연구를 바탕으로 적대국을 협상테이블에 끌어내야 하는 상황부터 제재를 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찾는 과정, 정책 실무자들의 고뇌와 좌절까지 책에 담아냈다. 100명이 넘는 핵심 인물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백악관 상황실, 유럽의 외교 무대, 월스트리트와 런던의 은행 본사, 크렘린궁과 중난하이에 이르는 현장을 넘나들며 총성 없는 싸움을 정치드라마처럼 펼쳐낸다.
책에 따르면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패는 미국으로 하여금 값비싼 지상전 대신 새로운 압박 수단을 찾게 했다. 그 가능성이 처음 시험대에 오른 사건이 2005년 북한에 대한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였다. 세계화된 금융망의 ‘병목’을 겨누는 방식이 실제로 먹힌다는 사실을 확인한 미국이 본격적으로 무기를 휘두른 상대가 바로 이란이었다.
2006년 미국은 핵 능력이 빠르게 진전되던 이란을 표적으로 조준했다. 인구로나 영토로나 ‘체급’이 큰 이란은 전 세계 원유 수송량의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의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고, 세계 3위 석유 매장량과 2위 천연가스 매장량을 가진 나라다. 이란에 실질적인 경제적 압박을 가하려면 수익성 높은 석유 수출을 차단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석유 구입을 강제로 막을 수도 없고, 정면 공격에 나섰다간 원유 가격 급등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허점은 있었다. 이란 은행이 유럽이나 아시아의 상대 은행에 대금을 지급할 때, 그 거래는 뉴욕의 대리 계좌에 잠시 머무르고 최종 목적지로 우회하는 식으로 미국 금융 시스템을 거쳐갔던 것이다. 미국 재무부는 자산 동결과 거래 금지를 포함하는 ‘차단 제재’를 통해 이란을 국제 금융 체계로부터 분리시켰다. 하지만 2011년에도 중국의 엄청난 수요 등으로 자금 유입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이란에 해외 조건부 계좌를 개설하도록 강제해 석유 수익이 이란 정권으로 다시 흘러가는 대신 해외 계좌에 쌓이도록 금융 제재를 가했다. 이란 경제가 곤두박질치면서 협상은 본격화됐고 2015년 이란이 핵 프로그램을 대폭 축소하는 ‘이란 핵 협정(JCPOA)’에 이른다. 저자는 협정의 의의를 다른 각도에서 평가한다. “미국이 경제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미국이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만들어낸 것에 그치지 않고 국제 금융 체계를 개편해냈다는 것이다.
미국이 쥔 초크포인트는 기축통화 달러를 기반으로 구축된 달러 결제망과 SWIFT(국제 은행 간 금융통신 협회·은행 간 거래 정보를 주고받는 서비스) 같은 금융 인프라, 그리고 첨단 반도체와 같은 기술 공급망이다. 책은 미국이 이란에서 금융 제재의 위력을 확인하고, 2014년 크름반도 병합 이후 러시아 제재를 확대하고, 기술 패권에 도전하는 중국을 상대로는 공급망 통제에 나서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다시 에너지·금융·무역 제재를 총동원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중국이 5G 통신망의 핵심 장비를 장악하면 심각한 안보 위협이 될 것으로 보고 화웨이를 정조준했다. 2020년에는 미국 기술로 만든 해외 반도체까지 공급하지 못하도록 수출 통제를 강화했다. 미국의 압박은 개별 기업을 넘어 중국 첨단 반도체 산업 전반으로 확대됐고, 이 과정에서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중국에 경제적 피해를 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이미 목도하고 있듯 세계화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세계는 분열하고 있다. “승리에는 대가가 따랐다. 새로운 경제적 철의 장막이 전 세계에 드리워지면서 미국은 결국 장막 뒤에 홀로 남겨질 위기에 처했다.”
미국의 경제 무기는 “펜 하나로 공표한 간단한 규제”가 러·우 전쟁 중에 8000㎞ 떨어진 흑해 보스포루스 해협에 유조선들을 줄지어 세울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경제전이 미국의 뜻대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JCPOA는 2018년 미국의 합의 파기로 원점으로 돌아갔고, 이번 파국에 이르렀다. 러시아 제재는 전쟁을 막지 못한 채 균열과 피로를 드러내고 있으며, 중국과의 경제전은 장기 대치로 굳어지고 있다.
미국이 만든 질서를 미국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이 책은 노골적으로 미국중심주의를 드러낸다. 그 영향권에 있는 한국 독자로선 남 이야기처럼 책을 읽기 어렵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트럼프 2기의 관세가 단순한 압박 카드가 아니라 세계 무역에서 미국의 역할을 다시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고 짚는다. 과거와 달리 동맹국까지 겨냥하고, 상대의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일시적 수단이 아니라 세계 경제를 장기적으로 다시 짜기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옮긴이의 말처럼 “때리는 사람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면, 미국이 왜 지금 이런 결정을 내리고 있는지, 세계를 어떻게 재편하려 하는지 이해하는 데 유용한 시야를 제공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