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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모든 혁신은 불완전한 첫 시도에서 시작된다”…나이키 ‘문 슈’가 보여준 프로토타입 정신

18일 서울대 제1파워플랜트에 마련된 나이키의 ‘Version 0: Prototype’ 전시장.

18일 서울대 제1파워플랜트에 마련된 나이키의 ‘Version 0: Prototype’ 전시장. 김혜린 기자 sinnala8@donga.com

“우리는 보통 완성된 것에서 감동을 받는다. 하지만 모든 위대한 것은 누군가의 서툴고 불완전한 첫 시도에서 시작됐다.”

나이키의 ‘Version 0: Prototype’ 전시에서 큐레이션을 맡은 배우 겸 디렉터 봉태규 씨의 말이다. 이번 전시는 모든 혁신의 시작점이자 근본이 되는 ‘프로토타입’을 통해 완성된 결과보다 그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 가능성을 향한 시도에 주목했다. 패션 브랜드 전시지만 완성된 제품을 나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프로토타입이라는 주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 8명의 아티스트와 협업해 창작물을 선보였다.

● 주방 와플 기계에서 탄생한 나이키 혁신의 뿌리 ‘문 슈’

‘문 슈’는 1970년대 초 빌 바워먼의 실험에서 탄생한 초기 러닝화 프로토타입이다. 당시 미국 오리건대 육상팀 코치였던 나이키 공동창업자 빌 바워먼은 선수들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방에 있던 와플 기계의 격자무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격자무늬의 돌출된 패턴이 가벼우면서도 뛰어난 접지력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와플 기계 틀에 액상 우레탄을 부어 밑창을 만들었다.

그렇게 나이키 최초의 러닝화 ‘문 슈’가 탄생했다. 와플솔이 남긴 발자국이 달 표면을 걷는 우주비행사의 발자국과 닮았다는 점에서 이름 붙여졌다. 이후 오리건대 육상팀이 문 슈를 신고 NCAA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한 코치의 작은 실험은 새로운 러닝화 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와플 기계에 액상 우레탄을 부어 밑창 ‘와플 솔’이 만들어졌다. 김혜린 기자

나이키는 문 슈를 모든 혁신의 원형으로 꼽는다. 완성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많은 가능성을 품을 수 있었던 신발이라는 것이다. 문 슈는 정식 출시되지는 않았지만 그 유전자는 1973년 ‘오리건 와플’을 거쳐 1975년 나이키 최초의 블록버스터 히트작인 ‘와플 트레이너’로 이어졌다.

문 슈는 지난해 1월 나이키와 협업한 디자이너 자크뮈스의 런웨이에 등장하며 다시 주목받았다. 반세기 전 탄생한 초기 프로토타입이 현재의 패션 무대에서 재해석되며 새로운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 패션부터 공예까지…8명의 작가가 풀어낸 ‘프로토타입’

18일 찾은 서울대 제1파워플랜트는 일반적인 전시장이나 팝업스토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높은 천장과 거친 산업적 미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래 전기실로 쓰이던 공간을 학생들의 문화·창작 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나이키가 이곳을 전시 장소로 택한 것도 문 슈가 가진 ‘프로토타입’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나이키 관계자는 “원래 전기실이라는 목적을 가진 공간이었지만, 기능이 사라진 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문화창작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점이 문 슈와 닮았다”며 “대학이라는 공간 역시 사회에 나가기 전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학생들이 모인 곳이라는 점에서 전시의 의미와 결이 맞는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1층에서는 위가 보이지 않지만 2층에서는 아래층이 선명하게 보인다. 김혜린 기자

전시는 2개 층으로 구성됐다. 1층은 스케치와 샘플 등 하나의 작품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프로토타입(Prototype)’ 공간, 2층은 그 과정을 거쳐 도달한 ‘재해석(Rendition)’의 공간이다. 두 공간 사이에는 한쪽에서만 상대편을 볼 수 있는 특수 유리를 설치했다. 1층에서는 2층을 볼 수 없지만 2층에서는 1층을 내려다볼 수 있다. 과거에서는 미래를 볼 수 없지만 미래에 도달한 뒤에는 지나온 과거를 돌아볼 수 있다는 의미다. 전시의 주제인 ‘프로토타입’과 완성의 관계를 공간 구조 자체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프로토타입’을 주제로 패션, 가구 디자인, 순수미술, 공예 등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8명의 아티스트가 제작한 작품을 선보인다. 각각의 작가가 자신의 작품 세계에 프로토타입이라는 개념을 녹여냈다.

패션브랜드 ‘영앤생’의 작품. 김혜린 기자

조계주 작가의 작품. 김혜린 기자

패션 브랜드 ‘영앤생’은 데님과 가죽이 입는 사람의 생활 습관에 따라 서로 다른 주름과 흔적을 남긴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가죽과 데님을 합친 원단으로 옷을 만들면 어떤 흔적이 남을까’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베틀 등을 이용해 직접 원단을 제작했다.

1층에는 원단을 만드는 데 사용한 도구와 작업 테이블, 스케치, 테스트 작업물 등을 배치해 제작 과정을 보여줬다. 2층에서는 베틀을 통해 완성된 원단을 선보였다.

조계주 작가는 곤충의 진화 과정에 문 슈의 역사를 겹쳐 표현했다. 서로 다른 종과 형태가 하나의 계보 안에서 분화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문 슈에서 시작된 러닝화의 진화를 보여준다. 형태는 달라졌지만 출발점에서 만들어진 흔적이 이후의 신발에도 남아 있다는 점에서 생물의 진화와 나이키 신발의 계보를 연결했다.

● 문 슈에서 수많은 러닝화로…50년 혁신의 계보 한눈에

아티스트 8명의 작품을 살펴보고 내려오면 ‘문 슈’를 아카이빙 해둔 공간이 펼쳐진다. 이곳에는 문 슈에서 시작해 나이키의 수많은 러닝화로 뻗어나간 계보를 모아뒀다. 와플솔에서 출발해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된 제품들을 볼 수 있다. 나이키 관련 잡지와 신문, 사진 등도 함께 전시했다.

자료와 제품은 아키비스트가 이베이 등 해외 경매 사이트와 국내 곳곳을 직접 찾아 수집했다. 문 슈와 형태적으로 닮은 ‘아스트로그래버(Astrograbber)’ 초판 모델처럼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제품도 직접 찾아 전시장에 들여왔다.

관람객이 직접 프로토타입 제작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빌 바워먼이 와플 기계에 우레탄을 부어 밑창을 만들었던 방식에서 착안했다. 진공성형기를 활용해 다양한 소재를 신발 밑창에 찍어 자신만의 솔을 만들어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단순히 문 슈를 과거의 아이콘으로 회고하는 자리가 아니다. 거듭된 실험과 실패를 거쳐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낸 나이키의 ‘프로토타입’ 정신이 전시 전반에 담겨 있었다. 전시는 오는 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대학교 제1플랜트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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