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매거진F] 대머리 여가수와 빈 객석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한강 작가를 좋아하는 프랑스 지인이 동영상을 보내왔다. 지난 7월 4일부터 25일까지 프랑스 아비뇽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 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의 한 무대에서 한강 작가가 자신의 글을 낭송하는 장면이었다.

[매거진F] 대머리 여가수와 빈 객석

▲ 송천석 에디미디 출판사 대표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한강 작가를 좋아하는 프랑스 지인이 동영상을 보내왔다. 지난 7월 4일부터 25일까지 프랑스 아비뇽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공연예술 축제 ‘아비뇽 페스티벌’의 한 무대에서 한강 작가가 자신의 글을 낭송하는 장면이었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가 매년 여름 전 세계 공연예술인들과 관람객들로 가득 차는 광경은 낯설고 부럽기만 하다.

아비뇽 페스티벌은 1947년 연출가 장 빌라(Jean Vilar)가 교황궁을 무대로 삼으면서 시작되었다. 14세기 프랑스 왕이 교황청을 강제로 옮겨온 ‘아비뇽 유수’의 그 도시가 맞다. 올해는 좀 더 특별하다. 공식 초청작 47편 중 9편이 한국 작품이었고, 축제 80주년을 맞아 한국어가 영어, 스페인어, 그리고 아랍어에 이어 네 번째, 아시아 언어로는 최초로 공식 초청받은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리엔 프랑스어와 한국어로 공연장 이정표가 세워지고, 교황청 벽면에는 한국어로 된 공연 일정이 나붙었다. 비공식 공연까지 합치면 1,800개 작품에 140만 장이 넘는 표가 팔렸다고 한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극장이 된 셈이다.

이 축제를 지탱하는 힘은 결국 프랑스인의 오랜 연극 사랑이 아닐까. 프랑스 공연예술협회가 매년 실시하는 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연극을 관람했다고 답한 인구는 약 1,130만 명, 공연예술 전체로 넓히면 2,600만 명을 넘는다. 필자가 대학원에서 이오네스코를 공부하던 시절 자주 찾던 파리 5구에 있는 위세트 극장은 1957년부터 지금까지 69년째 ‘대머리 여가수’와 ‘수업’만을 무대에 올리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이 2만 회 넘게 공연된 것은 세계 연극사에도 유례가 드문 기록이다. 안티 테아트르(반연극)라는 부제로 1950년 파리에서 초연된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과 몇 년 뒤 공연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곳곳의 무대에 오르고 있다. 좋은 연극 한 편이 극장을 되살린다. 국민들의 연극 사랑은 한 도시를 넘어 한 국가를 돋보이게 하는 문화를 만든다.

한국 문화의 위상이 높아져 프랑스에까지 한국의 공연예술이 초청받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년 자료를 보면 다소 무안해진다. 한국 성인의 연극 관람률은 4.7%에 그쳤다. 영화 관람률 50.6%와는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간간이 이름 있는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이나 뮤지컬은 표값이 비싸도 객석이 채워지지만, 무명 배우들이 오르는 소극장은 대체로 한산하다. 며칠 전 관람한 등골 서늘하면서도 웃음이 나는 여름 특집 공포 체험극 정도가 그나마 눈길을 끌 뿐이다. 아비뇽 축제를 표방하는 거창국제연극제, 밀양연극제 등 전국에 크고 작은 연극제가 있지만, 아비뇽처럼 도시 전체가 무대가 되고 세계인이 모여드는 축제로 자라기까지는 아직은 부족해 보인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이 반세기 넘게 살아남은 힘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킨 극장과 그곳을 꾸준히 찾은 관객에게 있다. 연극 축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지원과 제도도 필요하지만, 결국 사람이 극장을 방문하고 객석에 앉아야 무대가 살고 배우가 살고 문화가 자리잡는다. 끝나가는 이번 여름, 이름 없는 배우들이 오르는 근처 소극장 문을 살며시 열어보는 것은 어떨까. 텅 빈 객석이 조금씩 채워져 가면 언젠가 작은 도시 전체가 무대가 되고 한국어로 공연되는 문화를 즐기러 오는 세계인들로 가득 차는 유쾌한 여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 기사 공유하기
페이스북X

이 기사를 추천합니다

i

댓글

0

후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이 기사에 첫 의견을 남겨보세요.

댓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