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전주천가 시극 페스티벌…150여 관객 시와 음악·춤에 빠져
7세때부터 시작한 한국무용 지영선 헤드라인전북 대표, 수십 년 세월 넘어 다시 무대로
금빛 천 휘감은 몸짓과 전주 풍경·학의 비상 절묘한 조화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춤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었다”
[스포츠서울 ㅣ 전주=고봉석 기자] 전주의 산과 물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스크린 속 저녁노을 아래 전주천이 유유히 흐르고 하늘에는 학들이 날아올랐다.
그 순간 무대 아래에서 한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분홍빛 치마 위로 금빛 천을 두른 지영선(57세) 씨였다. 두 팔을 천천히 펼치자 조명을 받은 금빛 천이 출렁였다. 거대한 새가 비상을 앞두고 날개를 펼치는 듯했다.
팔끝이 움직일 때마다 금빛 천은 살아 있는 날개가 됐다. 한쪽 팔이 하늘을 향하면 시선도 손끝을 따라 올라갔다. 몸을 낮췄다가 다시 일어서고 허리를 비틀어 팔을 길게 뻗을 때는 물가의 학 한 마리가 창공으로 날아오르는 순간을 보는 듯했다.
지난 8일 오후 3시 전주교육대학교 황학당에서 열린 ‘제13회 전주천가 시극 페스티벌’ 현장이다.
소울공연예술원이 주최하고 참컴퍼니와 극단 달챙이가 주관한 이날 행사는 전주시와 전북재능시낭송협회의 후원으로 마련됐다. 객석을 채운 150여 명의 관객은 시와 음악, 연극과 춤이 어우러진 무대를 지켜봤다.
‘시가 이야기가 되고, 시가 무대가 되어 사람을 품습니다’라는 취지처럼 이날 무대는 문학을 읽고 듣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몸짓과 음악, 연극으로 풀어냈다.
제1부 시극 퍼레이드에서는 청아작은도서관의 ‘다시 부르는 용비어천가’, 소풍온문화예술의 ‘내 고향 전주’, 익산재능시낭송회의 ‘눈물은 왜 짠가’가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제2부 축하공연에서는 맑은소리 공연단의 하모니카·오카리나 연주와 ‘소리로 노세’의 민요 등이 펼쳐졌다.
하지만 이날 공연의 백미는 따로 있었다.
‘다시 부르는 용비어천가’ 무대에 오른 지영선 씨의 춤사위였다.
현재 50대 후반인 지 씨는 최근 인터넷매체 ‘헤드라인전북’을 창간해 대표로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에게는 또 하나의 이력이 있다.
7세때부터 시작해서 대학 시절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학교를 떠난 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무대에 선 순간 몸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무용수의 감각이 다시 깨어났다.
춤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수십 년 세월 넘어 손끝에서 되살아난 춤
처음에는 절제됐다.
지 씨는 상체를 낮추고 금빛 천을 가슴 가까이 끌어안았다. 음악의 흐름을 타고 오른팔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자 왼팔이 뒤를 받쳤다.
손끝과 시선이 따로 놀지 않았다.
팔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가 따라갔고 시선은 다시 손끝 너머 먼 곳을 향했다. 무릎을 굽혀 몸의 중심을 낮췄다가 천천히 일으키는 한국무용 특유의 호흡도 살아 있었다.
한 장면에서는 금빛 천을 양팔에 걸친 채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크게 펼쳐진 천은 학의 날개처럼 무대 좌우로 뻗어나갔다.
또 다른 순간에는 두 팔을 머리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 금빛 천 끝자락이 여러 갈래로 흩날리면서 학이 힘차게 날갯짓하며 솟구치는 형상을 만들어냈다.
몸을 낮추면 무대에 정적이 흘렀고 다시 팔을 펼치면 금빛 날개가 살아났다.
수십 년이 흘렀지만 무용의 중심을 잡아주는 ‘코어’는 살아 있었다. 몸통을 중심으로 어깨와 팔, 목과 시선이 하나로 연결되며 유려한 선을 만들었다.
지 씨는 공연을 마친 뒤 무대에 다시 선 순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7세때부터 시작해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지만 세월이 워낙 많이 흘러 다시 무대에 선다는 것이 사실 부담스러웠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아도 음악이 흐르자 신기하게도 몸이 옛 동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관객들에게 전주의 아름다움과 우리 춤의 멋을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마음으로 춤췄습니다.”
‘용비어천가’와 춤이 만나자 학이 날았다
무대 뒤 대형 스크린에는 전주의 풍경이 펼쳐졌다.
산줄기 사이로 전주천이 흐르고 강물 위에는 노을이 내려앉았다. 멀리 다리가 보이고 황금빛 하늘에는 학이 날았다.
스크린 속 학과 무대 위 지 씨의 몸짓이 절묘하게 겹쳐졌다.
‘용비어천가’가 품은 역사적 이미지와 전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학의 비상이 춤으로 연결됐다.
음악이 고조되자 춤도 커졌다.
지 씨가 양팔을 좌우로 활짝 펼쳤다. 금빛 천이 공기를 가르며 크게 출렁였고 분홍빛 치마는 회전하는 몸을 따라 원을 그렸다.
다시 두 팔이 하늘로 솟구쳤다.
고개를 들고 위를 응시했다. 시선은 손끝보다 더 먼 곳을 향했다. 손끝 하나까지 힘을 놓지 않은 몸짓에서는 짧은 무대에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는 집중력이 묻어났다.
약 3분 30여초.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 씨는 그 시간 동안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무대 위에 모두 풀어냈다. 빠른 몸짓 뒤에는 느린 호흡을 놓았고, 큰 동작 뒤에는 몸을 낮춰 정적을 만들었다.
움직임과 멈춤, 펼침과 접힘이 교차했다.
그때마다 금빛 천은 옷이 아니라 날개가 됐다.
한쪽 팔을 길게 뻗어 몸을 회전하는 순간에는 커다란 학 한 마리가 전주천 위를 선회하는 듯했고,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린 순간에는 금빛 날개를 힘껏 퍼덕이며 하늘로 솟구치는 듯했다.
객석은 어느새 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지 씨가 몸을 낮췄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황금빛 하늘을 배경으로 학이 날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지 씨가 금빛 날개를 접듯 자세를 낮추면서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 완성됐다.
무대를 내려온 지 씨는 수십 년 만에 다시 춤을 선보인 의미를 이렇게 전했다.
“나이는 숫자…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마음 전하고 싶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젊은 시절 좋아했던 것까지 마음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 무대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언론인으로서 지역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기회가 된다면 우리 문화와 예술을 알리는 일에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그에게 이번 무대는 단순한 공연 이상의 의미였다.
젊은 날 익혔던 한국무용을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불러냈고, 이제는 인터넷매체 ‘헤드라인전북’을 창간해 언론인으로서 또 다른 출발선에 섰다.
한 사람의 삶에서 언론과 춤은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하나는 글과 기사로 말하고, 다른 하나는 몸과 손끝으로 이야기한다.
이날 ‘전주천가 시극 페스티벌’에서는 시낭송과 시극, 하모니카·오카리나, 민요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하지만 막이 내린 뒤에도 유독 강한 잔상을 남긴 것은 황금빛 천을 날개 삼아 ‘용비어천가’ 속을 날았던 지영선 씨의 춤사위였다.
전주의 노을을 뒤로하고 두 팔을 활짝 펼쳤던 순간. 그는 인터넷신문 대표도, 50대 후반의 언론인도 아니었다.
무대 위를 자유롭게 비상하는 한 마리 학이었다.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펼쳐진 그 날갯짓.
단 3분이었지만, 객석에 남긴 여운은 길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