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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딥피플] 장항준과 천만의 문법…600년 전 실패한 정의가 2026년에 되살아...

세조의 광릉과 한명회 묘역에는 별점 테러가 쏟아져 카카오맵이 장소 세이프 모드를 발동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관광 수요의 증가가 아니었다. 영화가 과거에 잠들어 있던 감정을 깨워 현재의 분노와...

[딥피플] 장항준과 천만의 문법…600년 전 실패한 정의가 2026년에 되살아...

(톱스타뉴스 장영권 기자) 영화가 끝난 뒤에도 어떤 장면들은 어둠 속에서 오래 머문다. 단종이 유배지의 문 안으로 사라지던 그 순간, 카메라가 더 이상 따라가지 않기로 멈춰 선 자리. '왕과 사는 남자'가 남긴 가장 깊은 울림은 오히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장면에서 비롯됐다. 슬픔은 선명하게 드러날 때보다, 여백 속에 남겨질 때 더 오래 남는다. 장항준은 그 사실을 알고, 카메라가 멈춘 자리의 공백에 조용히 시선을 두었다.

흥행의 빛은 분명 눈부시지만, 그 빛이 닿지 않는 자리 또한 또렷이 존재한다. 손에 쥐지 않은 선택, 지나간 판단, 그리고 뒤늦게 떠오르는 수많은 가능성들. 그러나 장항준은 그것들을 무겁게 짊어지기보다, 가볍게 웃음으로 건네며 말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한 편의 이야기처럼 다시 꺼내 보이듯, 천천히 되짚으며.

그 이야기의 숫자는 이렇다. 2026년 3월 22일 기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누적 관객 수는 1444만 7740명. 역대 한국 개봉 영화 흥행 3위, 누적 매출 1425억 원으로 역대 매출 1위. 2014년 '명량' 이후 사극이 좀처럼 허물지 못했던 천만의 벽을 깬 감독이다. 예능에서 "아내가 돈 잘 번다"는 농담으로 웃음을 사오던, 바로 그 장항준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장항준 감독, 누적 관객 1444만 돌파 속 여백의 연출 철학 주목. (사진=톱스타뉴스 장호연 기자)

그런데 정작 장항준은 이 거대한 흥행의 열매를 계약 구조상 직접 가져가지 않았다. 유튜브 채널 '비보티비' 웹예능 '임형준의 연기의 성'에서 배우 김의성과 임형준이 "러닝 개런티만 해도", "천만이면 얼마냐"라며 호기심을 드러내자, 장항준은 깊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데 내가 러닝을 안 걸었다." 이어 그는 "러닝을 걸자고 했는데 내가 감독료를 500만~600만 원 더 받자고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곁에 있던 김의성은 "러닝 안 거는 감독이 어딨냐"고 반응했고, 임형준은 "너무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러닝 개런티는 손익분기점 이후의 관객 수 또는 매출에 연동해 감독과 배우에게 추가로 지급되는 성과 보상 구조다. 순제작비 약 100억 원, 손익분기점 260만 명, 그리고 1444만 명을 넘어선 최종 관객 수를 고려할 때, 업계에서는 관객 1인당 300~500원 수준을 기준으로 장항준이 택하지 않은 러닝 개런티 규모를 최소 수십억 원대로 추산한다. 일부에서는 단순 계산으로 35억~70억 원 안팎까지 거론하며 "수십억을 날렸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다만 이 장면이 담긴 '임형준의 연기의 성'은 현실과 허구를 교차시키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영상 앞부분에 '100% 허구'라는 경고 문구가 삽입돼 있다. 발언이 실제 계약 조건을 그대로 반영한 것인지에 대한 해석은 갈린다. 그럼에도 같은 채널의 별도 콘텐츠 '비밀보장'에서 장항준이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지분을 아주 조금 걸어놨다", "비보 사옥 앞에 큰 건물을 지을 수 있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발언한 대목이 함께 회자되면서, 대중은 허구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농담과 진심이 뒤섞인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 이야기가 단순한 돈 이야기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장항준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흥행이 불확실하던 계약 시점에서, 불투명한 성과 보상보다 확정 수입을 선택한 판단은 결과론적 아쉬움일 뿐,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안전의 선택이었을 수 있다. 예측 불가능한 흥행 산업에서 '놓친 수익'은 사후에야 비로소 보인다. 장항준은 이 구조를 과장된 탄식과 웃음의 형식으로 바꿔냈다.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는 그 장면은, 일종의 '천만 감독의 허탈한 농담'으로 소비됐고, 동시에 수십억 원짜리 기회비용조차 유머의 소재로 전환하는 그의 방송인적 캐릭터가 다시 한번 확인됐다.

장항준이라는 감독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궤적은, 어느 하나의 직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1969년 대구 출생인 그는 서울예대에 입학하면서 이미 우연과 실수의 편을 들었다. 원래는 영화과에 지원하려다 실수로 연극과에 원서를 냈다. 면접장에서 스스로 떨어졌다고 직감했지만, 고등학교 때 써온 시를 읊었고 그것이 합격으로 이어졌다. 실수로 들어간 문의 안쪽에서, 그는 나중에 각본가의 감각으로 거둘 씨앗들을 키웠다. 세상에는 의도한 선택보다 우연히 발을 들인 방 안에서 더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있다. 장항준은 그런 유형이었다.

졸업 후 영화사 연출부를 거쳤다가 영화사 부도로 방향을 틀었고, 선배의 소개로 방송국 FD로 들어가 6개월 만에 메인 작가로 올라섰다. SBS 예능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리듬과 감각은 훗날 그가 만드는 영화마다 단단한 저변이 됐다. 웃음과 긴장을 교차시키는 솜씨, 인물의 허술함을 따뜻함으로 전환하는 기술, 그리고 대중이 어디에서 숨을 고르는지를 아는 감각. 이것들은 예능 작가의 책상에서 연마된 것들이었고, 장항준은 그것을 필름 위로 옮겨왔다. 1996년 코미디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 각본으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처음으로 영화계에 발자국을 찍었다.

그러나 장항준 감독의 진면목은 장르를 건너다니는 방식에 있었다. 2002년 코미디 '라이터를 켜라'로 감독 데뷔한 이후, '불어라 봄바람', 스릴러 '기억의 밤', 스포츠 영화 '리바운드'를 거쳐 마침내 사극 '왕과 사는 남자'까지 왔다. 장르는 달랐지만 그가 고수한 방법론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어딘가 부족하고 허술하지만 정이 가득한 인물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는 것, 긴장과 웃음을 교차시켜 관객의 경계심을 낮추는 것,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과 동료와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온기를 남기는 것. 그것이 장항준의 언어였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산골 마을 촌장 엄흥도라는 인물 역시 그 언어의 연장선 위에 서 있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처음부터 장항준이 하고 싶었던 작품이 아니었다. 그는 이 시나리오를 여러 차례 고사했다. 제작비 투자 가능성도 불투명했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그러나 제작자는 장항준이 제시한 시나리오 수정 방향을 듣고 "무조건 감독님이 해야 한다"며 일주일의 시간을 요청했다. 고사와 권유 사이에서 장항준이 최종적으로 돌아선 것은 아내 김은희 작가의 말 한마디였다. 처음엔 사극이라 부담스럽다고 했다가, 초고를 읽은 뒤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 한마디가 결정을 굳혔다. 이후 스무 번 이상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장항준 감독이 ‘왕과 사는 남자’ 무대 인사에 참석했다. (사진=톱스타뉴스 장호연 기자)

감독이 단종의 이야기에 끌린 이유는 표면의 사극성 때문이 아니었다. 제5공화국 시기 대학을 다니며 품었던 물음, "성공한 역모는 인정받아야 하는가, 실현되지 못한 정의는 잊혀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단종의 이야기와 흡사하게 겹쳤다. 실패한 정의의 뒷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던 욕망이 이 작품을 선택하게 한 진짜 힘이었다. 한양으로 올라가 수양을 끌어내리는 대체역사물 구성도 잠깐 고려했으나, 고증을 거치지 않은 사극은 쉽게 실패한다는 판단 아래 야사까지 뒤져 정통 사극의 노선을 택했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는 발언도 덧붙여졌다. 역사적 결말을 관객이 이미 알더라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이끌어낸다면 몰입이 가능하다는 것, 그 깨달음이 이 영화의 방향을 확정시켰다.

연출의 방법론은 섬세하고 의도적이었다. 세조를 직접 등장시키지 않고 한명회가 그 역할을 대체하도록 설계한 것은, "진짜 악의 축은 보이지 않을수록 더 무섭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단종과 금성대군의 저항이 한명회 선에서 처리되는 소란에 불과하다는 구조 자체가 이 영화의 비극성을 심화시키는 방식이었다. 그 구조는 관객에게 분노의 대상을 직접 제시하는 대신, 거대한 권력이 어떻게 가시화되지 않은 채 작동하는지를 서늘하게 감각하게 한다. 권력은 군주의 얼굴이 아니라 그 대리인의 냉정한 행정 처리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 그것이 이 영화가 선택한 역사 해석의 각도다. 악은 특정한 얼굴을 갖지 않을 때 가장 넓게 퍼진다.

단종의 마지막을 담은 장면에서 감독이 선택한 절제는 더욱 인상적이다. "슬픔은 바깥에 있다. 문 너머에 있다." 직접 보여주지 않는 것, 그 빈 공간에 슬픔을 밀어 넣는 방식. 클로즈업 대신 거리를, 울음 대신 문 한 짝을 선택하는 용기는 흔히 감독의 자신감에서 나온다. 장항준은 이 장면에서 관객에게 감정을 주입하는 대신, 감정이 자라날 여백을 남겨두었다. 이 장면을 회상하며 유해진은 눈물을 참지 못했고, 박지훈은 먼 발치에서만 지켜봤다고 고백했다. 배우들의 몸에 먼저 새겨진 슬픔이,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건너가는 방식이었다. 카메라 밖에서도 영화는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촬영 현장은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었다. 실제 단종 유배지 청령포는 이미 관광지화돼 있어 유사한 지형을 찾아 토목공사로 길을 내고 배소 오픈 세트를 지었다. 법적으로 영구 건축이 불가능한 지역이어서 촬영 종료 후 전부 철거하고 원상복구했다. 광천골 산채 장면은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에서, 이동 장면은 쌍용계곡에서, 관아 장면은 고령 김면 장군 유적지에서, 노루골 장면은 평창 웰컴 투 동막골 세트장에서 각각 이어졌다.

한 편의 영화는 결국 수십 개의 장소에서 분산된 채 만들어지고, 편집이라는 행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로 묶는다. 청령포의 세트는 지어지고 허물어졌지만, 영화 안에서 그 공간은 영구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단종은 여전히 살아있다. 지워진 자의 이야기를 지워지지 않는 형식으로 남기는 것, 그것이 사극이 선택하는 방식이자 이 영화가 만들어진 이유다.

캐스팅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언어였다. 엄흥도 역의 유해진은 시나리오 수정 단계부터 장항준이 염두에 둔 인물이었고, 그의 캐스팅 확정이 100억 원대 투자 유치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서울예대 선후배 사이로 '라이터를 켜라' 때부터 함께해온 오랜 협력자다. 어딘가 부족하고 허술하지만 정이 가득한 인물, 장항준이 즐겨 만드는 그 유형의 인물을 가장 잘 육화할 수 있는 배우로 감독은 언제나 유해진을 지목해왔다. 유해진의 몸짓이 가진 무게, 말의 속도, 눈빛의 온도가 엄흥도의 무게를 감당했다.

단종 역의 박지훈은 캐스팅 미팅 당시 살이 많이 찐 상태였다. 4번의 미팅 끝에 출연을 결정한 뒤 그는 운동이 아닌 단식에 가까운 방식으로 15kg을 감량했다. "사과 한 쪽만 먹으면서 버텼고, 목소리에 버석함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 물도 최대한 안 마셨다"는 그의 발언은, 이홍위라는 인물에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육체가 먼저 그 인물이 되는 방식. 그것이 박지훈의 접근법이었고, 스크린 위의 단종이 그토록 가녀리고 서늘하게 느껴진 이유 중 하나다. 굶는 것으로 유배를 먼저 살기 시작한 배우가 만들어낸 얼굴이 그 영화 안에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사진=쇼박스)

한명회 역의 유지태는 드라마 '비질란테' 촬영을 위해 100kg까지 벌크업한 몸 상태를 유지한 채 촬영에 임했다. 기존에 왜소하고 간사한 이미지로 묘사되던 한명회의 전형을 깨고, 사료 속 풍채가 큰 인물을 구현하기 위해 수염 결을 거칠게 하고 선한 눈매를 덮기 위해 눈가에 테이핑을 했다. 배우가 자신의 육체를 재료 삼아 역사 속 인물을 새로 설계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한명회를 만들었다.

전미도의 매화 역은 원래 비중이 거의 없는 인물이었다가 그의 캐스팅 수락 이후 시나리오가 수정되며 비중이 늘었다. 광천골 아낙네 역을 맡은 배우 엄춘미는 실제 엄흥도의 직계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석에서 유해진에게 엄흥도에 대해 직접 설명해준 인물이기도 하다. 허구와 역사가 현장에서 만나는 방식이 이 영화에는 유독 많았다.

흥행의 궤적은 통상적인 패턴과 달랐다. 개봉 첫 주 11만 7000여 명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설 연휴를 거치며 역주행했고, 1주 차부터 4주 차까지 주간 관객 수가 오히려 늘어나는 곡선을 그렸다. 경쟁작이었던 '휴민트'와 '넘버원'이 설 연휴 직전 개봉을 택할 때, '왕과 사는 남자'는 일주일 먼저 개봉해 입소문을 선점했고 설 연휴의 수요를 독차지했다. 개봉 13일 차에 손익분기점 260만 명을 넘겼고, 31일 차인 3월 6일 오후 6시 30분에 천만을 돌파했다. 3월 1일 하루에만 81만여 명이 극장을 찾은 날도 있었다. 평일에도 30만 명 이상을 동원한 날이 여러 차례 기록됐고, 관객 감소 폭은 완만했다. 3월 22일에는 1425억 원의 누적 매출액으로 역대 한국 개봉 영화 매출액 1위에 올랐다.

영화가 만들어낸 파장은 극장의 경계를 넘어 이어졌다. 설 연휴 기간 영월 청령포 방문객은 전년 동기 대비 5배 이상 늘었다. 장릉과 청령포를 찾은 관광객이 2월 하순 이후 8만 명을 넘어섰고, 영주시는 금성대군 관련 유적을 연계한 관광 코스를 만들었다. 대구 군위군은 엄흥도 묘소 성역화를 추진했고, 강원 태백시·제천시·강릉시 등 각 지자체가 단종 관련 스토리를 발굴해 홍보에 나섰다.

교보문고 집계에서는 '조선왕조실록' 키워드 도서 판매량이 개봉 이전 대비 2.9배, 전년 동기 대비 2.1배 늘었다. 세조의 광릉과 한명회 묘역에는 별점 테러가 쏟아져 카카오맵이 장소 세이프 모드를 발동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관광 수요의 증가가 아니었다. 영화가 과거에 잠들어 있던 감정을 깨워 현재의 분노와 슬픔으로 이어붙인 결과였다. 600년 전에 억울하게 죽은 왕을 위해 별점을 남기는 사람들이 2026년 봄에 생겨났다는 사실이, 이 영화가 무엇을 건드렸는지를 설명한다.

영화 속 음식을 직접 요리한 영월의 어수리 더덕 정식 식당에는 '단종의 밥상'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3월 4일부터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청령포 인근 음식점 100여 개소에 대한 위생 점검에 나선 것도 이 흐름의 일부였다. 허구의 식탁이 현실의 골목을 바꿨다.

제작사 차원의 후속 보상 논의도 이어지고 있다. 제작사 온다웍스의 임은정 대표는 "제가 다 가져가는 구조가 아니라 나눠서 받는 구조"라고 밝히며,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인센티브 지급 방안을 공동 제작자와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센티브는 지급할 것"이라는 언급도 덧붙여졌다. 러닝 개런티와는 또 다른 형태의 보상 구조가 논의되고 있다는 시사였다.

천만이라는 숫자가 한 감독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장항준의 대답은 예상 밖에 있었다. 그는 같은 자리에서 차기작 구상을 내놓았다. "천만이 됐다고 해서 영화에 대한 초심을 잃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진짜 시나리오 정교하게 쓴 저예산 독립영화를 기획했다. 직접 제작하고 연출한다." 거대한 상업영화의 성공 직후,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진영으로 시선을 돌리는 선택. 천만 관객을 달성한 감독 다수가 대형 프로젝트와 프랜차이즈에 합류하는 흐름과 나란히 놓으면, 이 발언의 의미는 더 선명해진다. 물론 이 또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 안에 놓인 발언이어서 구체적인 제작 계획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저예산, 독립, 초심이라는 키워드의 반복은 장항준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고 싶은지를 드러낸다.

흥행이 가시화되던 시점에 그는 라디오 '배성재의 TEN'에서 천만 공약을 장난식으로 말한 바 있다. "천만 되면 전화번호 바꾸고 개명하고 성형할 것"이라던 공약은 3월 12일 서울신문사 광장에서의 커피차 이벤트로 대신됐다. 오전 10시부터 줄이 늘어섰고, 광주에서 올라온 관객도 있었으며, 현수막을 준비한 팬들도 있었다. 3월 11일 SBS 뉴스헌터스 출연에서 2천만 관객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는 먹자골목에 한 집만 번성하는 것은 그 골목 전체에 좋지 않다며 동료 감독들이 함께 행복했으면 한다고 답했다. 4월 24일 영월단종문화제에는 공식 참석하기 위해 해외 영화제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장항준이 걸어온 길은 언제나 실수와 우연과 포기의 연속이었다. 영화과에 가려다 연극과에 들어갔고, 영화사가 망해 방송국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러닝 개런티 대신 확정 수입을 택했다. 그 모든 어긋남들이 쌓여 결국 천만이 됐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최선의 선택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긋난 선택들을 가장 오래 품고 걸어가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놓친 것들의 무게를 웃음으로 감당하면서.

그래서 이 감독의 다음이 기대된다. 천만의 무게를 등에 지고서도 저예산 독립영화를 입에 올리는 사람, 영월단종문화제를 위해 해외 영화제를 취소하는 사람. 그는 숫자가 완성되는 순간 이미 그 자리를 떠나 다음 질문을 향해 걷고 있다. 실패한 정의의 뒷모습을 600년 뒤에 천만 명에게 보여준 감독이, 이번에는 어떤 작고 정교한 이야기를 들고 돌아올지. 그 기다림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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