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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강 | 고려대 교수(행정학)
경제적 능력이 최고 미덕이 된 시장 중심 사회에서 계산하지 않는 선택은 바보스러움이나 무능력으로 여겨진다.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인간형은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경제적 인간이다. 이는 감정을 멀리하고 모든 정보를 타산적으로 분석하고, 득실에 따른 합리적 판단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인간상이다. 이 인간형을 기준으로 삼아, 많은 사회적 관계가 효율과 비용, 선택의 문제로 재단되었다. 무한한 이기심을 좇는 타산적 인간은 당대가 요구하는 유능한 시민으로 표상되었다. 우리는 늘 손익계산서를 생각하며 삶을 기획하고 사회를 조직하며 국가를 운영해왔다. 아이를 낳을지, 부모님과 어떻게 살아갈지와 같은 삶의 깊은 선택들조차 이제 비용과 효율의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인간상은 근대 계몽주의가 빚어낸 이성 중심주의의 산물이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은 이성적 능력을 근거로 인간을 타인과 분리된 자립적인 존재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독립된 인간상은 허상이다. 모든 인간이 엄마 몸을 통해 취약한 신생아로 세상에 나왔음이 실상이듯, 누군가의 돌봄에 힘입은 삶의 구간이 없는 인간상은 허상이다. 인간은 돌봄에 힘입은 관계적 존재다. 이성 중심의 타산적 인간상은 누군가에게 의존해야 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은폐하고, 돌봄을 주고받아야 하는 삶의 4할에 육박하는 인간의 모습을 가치 있는 삶에서 삭제해왔다.
인간은 계산 능력을 장착하기 이전과 이후, 그리고 그사이 어느 순간에도 누군가의 돌봄을 주고받아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태어나 타인의 돌봄 속에서 자라고, 생의 마지막 역시 누군가의 손길 없이는 존엄하게 마감할 수 없다. 정치학자 조앤 트론토는 이 자명한 진실을 바탕으로 우리를 ‘호모 쿠란스’(Homo curans), 즉 돌보는 인간이라 부른다. 트론토는 단수형 ‘호모’ 대신 복수형인 ‘호미네스’를 사용하여 ‘호미네스 쿠란스’라고 부르자고 제안하는데, 돌봄이란 개인의 분투나 시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상호의존하며 함께 수행해야 할 민주적 연대임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회는 그간 시장의 논리를 앞세워 이 돌봄의 실재를 지워왔으나, 실상 인간은 계산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서로를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기능하는 순간조차 인간은 본질적으로 호모 쿠란스라는 사실이다. 돌보는 인간은 이성의 계산법에 매몰되는 대신, 내 앞에 있는 타인의 상태를 감지하고 살피며 그 결핍과 필요에 응답한다. 이는 성의를 넘어, 타인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실질적인 책임을 떠안는 행위다. 그 책임은 때론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며 아무런 보상도 약속하지 않는다. 돌보는 인간은 그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다. 시장적 인간이 계약과 효용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면, 돌보는 인간은 상호의존성이라는 삶의 실질적 토대 위에서 서로의 취약함을 보듬으며 세계를 지속시킨다.
경제적 인간과 돌보는 인간을 나란히 놓으면, 우리 존재의 원형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해진다.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개인의 책임과 선택의 자유를 내세우며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때, 호모 쿠란스는 그 고통에 귀 기울이며 의존이 낳는 책임을 기꺼이 감당한다.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돌봄을 비생산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낙인찍어온 근대의 기획은 이제 반성하고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다움의 원형은 계산기를 두드리듯 머리만 굴리는 개인이 아니라, 타인의 생물학적·사회적 취약함에 응답하는 돌봄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의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계산을 대신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데이터 분석과 효율성 예측에서 기계는 이미 인간을 압도하며, 인간이 자부하던 계산하는 능력을 낡은 유물로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기계가 도달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은 어디인가. 그것은 바로 타인의 고통을 내면화하고 그 필요에 책임감 있게 응답하는 돌보는 능력이다. 인지적 판단은 인공지능에 맡길 수 있어도, 생명을 보존하고 회복하며 인간다운 삶을 일구는 인간다움은 오직 인간, 즉 호모 쿠란스만이 할 수 있다. 결국 우리 삶의 여정이 출발하고 경유하며 종착되는 곳은 차가운 지능이 아니라, 서로를 보살피는 돌봄인의 심장이 이어지는 따뜻한 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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