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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길칼럼] 리벨리온-퓨리오사, 합쳐야 산다 [넘버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기업이 현재의 SK하이닉스다. '5대 그룹 빅딜'이라는 정책 하에 LG가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고 이를 현대에게 몰아준 결정이었다. 당시 정부가 은행 대출 중단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기에 LG의...

[돌담길칼럼] 리벨리온-퓨리오사, 합쳐야 산다 [넘버스]

이 기사는 2026년 04월 02일 21시 12분

넘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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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말 전세계 반도체 시장은 발칵 뒤집혀졌다. 엔비디아가 인공지능(AI) 추론용 칩 설계회사(팹리스) 그록(Groq)을 200억달러(약 28조원)에 인수했기 때문이다. 인수합병 관련 반독점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그록의 핵심 기술 자산과 지식재산권(IP), 주요 엔지니어 그룹을 흡수하는 '자산 인수 및 에퀴하이어(Acqui-hire)' 방식으로 진행했다. 업계에서는 엔비디아가 그록의 핵심 자산을 빠르게 흡수하기 위한 목적이 포함돼 있다고 해석했다.

그록과 마찬가지로 추론용 반도체 설계에 주력해온 국내 AI 반도체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엔비디아가 그동안 학습용 AI에 주력해오면서 상대적으로 반사이익을 누려왔지만 이제는 그록을 앞세운 시총 5000조 엔비디아와 전면 승부가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그록의 SRAM이 엔비디아 GPU의 약점인 시간 소모, 전력 소모를 메워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우려는 빠르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엔비디아는 지난 3월 베라 루빈(Vera Rubin) 플랫폼에 그록의 기술을 입힌 'Groq 3 LPX'를 내놓았다. 질문에 답변을 생성하는 과정(Decode)은 그록에게 맡겨 속도를 높이고 복잡한 연산은 기존 GPU인 루빈이 처리하는 구조다. '똑똑한 뇌(루빈 GPU)'와 '엄청나게 빠른 입(그록 LPU)'을 분리했다는 평이다. 이를 통해 엔비디아는 기존 대비 추론 효율을 35배 높였다고 주장했다.

5000조 엔비디아와 전면 대결, 대항마 필요하다

리벨리온과 퓨리오사로 대표되는 국내 AI 반도체 기업 입장에서 이 같은 상황은 분명 위기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과 효율성, 그리고 엔비디아가 등한시했던 추론 전용 아키텍처를 내세워 입지를 다졌지만 이제는 판도가 180도 달라졌다. 엔비디아는 자금력을 앞세워 추론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물론, 속도까지 보강했다. 일각에서는 엔비디아의 비싼 칩을 누구나 살수 없기 때문에 특정 모델에 최적화된 한국산 칩의 수요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틈새시장에 국한된 분석일 뿐이다.

이런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는 냉정한 현실 분석과 과감한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국가예산(2026년 728조원)의 7배가 넘는 시총 5000조원의 엔비디아는 단순히 국내 벤처기업 몇 개를 양성해서 맞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미국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가진 나라가 모든 AI 반도체 기업에게 넉넉한 지원을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는 국내 AI 반도체 기업 중 될 만한 놈들을 선별하고 이들을 합쳐서 엔비디아의 대항마로 만드는 구상을 논의해볼 때다. 즉 리벨리온과 퓨리오사의 합병을 검토해봐야 한다.

합치면 '풀스택' 라인업 완성

일단 리벨리온-퓨리오사 합병의 장점과 시너지가 매력적이다. 두 회사의 개발 인력을 합치면 국내 표준 AI 가속기의 소프트웨어 스택을 빠르게 구축할 수 있다. AI 반도체의 성공은 칩 자체보다 이를 구동하는 소프트웨어(SDK, 컴파일러 등)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발자들에게 엔비디아의 CUDA 못지 않은 편의성을 제공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제품 라인업을 상호 보완해주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리벨리온은 현재 추론 시장과 대규모 데이터센터 제품에 강점이 있고 삼성 파운드리를 활용한다. 반면 퓨리오사는 1세대 워보이(Warboy)부터 최근의 레니게이드(RNGD)까지 고성능 컴퓨팅 및 유연한 아키텍처 설계에 강점이 있으며 TSMC와의 협업 경험이 풍부하다. 두 역량을 합치면 엣지부터 초거대 모델 학습ㆍ추론까지 아우르는 '풀스택' 라인업이 완성된다.

여기에 한정된 국가 예산과 민간 투자금을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골리앗' 엔비디아와의 전쟁은 물론, 데스밸리(death valley)를 견뎌야 하는 반도체 시장에서 실탄 확보는 필수다.

합병비율 산정 쉽지 않아, 기술 충돌도 우려

반면 워낙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얽혀있는 만큼 걸림돌이 적지 않다. 우선 합병비율 산정이 쉽지 않을 것이다. 사피온과 합병으로 SKT, KT 등 대기업을 우군으로 확보한 리벨리온에 비해 퓨리오사는 실적과 투자 유치 속도가 상대적으로 뒤처진다는 평을 받는다. 그렇다고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퓨리오사가 이를 받아들이고 순순히 합병 주도권을 내줄 리도 없다.

양사에 투자한 벤처캐피탈과 대기업들도 합병비율 산정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할게 뻔하다. 전략적투자자(SI)들은 자사 서비스에 최적화된 칩을 공급받길 원하는데, 합병 법인이 이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하느냐도 숙제가 될 것이다.

기술적인 충돌 가능성도 감안해야 한다. 리벨리온은 주로 삼성 파운드리, 퓨리오사는 TSMC 공정을 사용해왔다. 두 회사의 칩 설계 방식(아키텍처)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개발하던 프로젝트를 폐기하거나 전면 수정해야 하는 효율성 저하가 발생할 수 있다. 합병 후 경영권과 기술 로드맵의 주도권을 누가 쥘지를 놓고도 치열한 싸움이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엔지니어들의 유출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 때문에 리벨리온과 퓨리오사가 갑작스럽게 합병으로 직진하기 보다는 'K-AI 반도체 표준 SW(소프트웨어) 컨소시엄' 등을 통해 기술적 접점을 먼저 넓힌 뒤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 자연스럽게 하나로 뭉치는 시나리오도 검토해볼만 하다.

하이닉스 빅딜 교훈, "기업 스스로 필요성 느껴야"

리벨리온-퓨리오사 합병과 비슷한 전례는 이미 30여년 전 있었다. 1999년 현대-LG의 반도체 빅딜이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기업이 현재의 SK하이닉스다. '5대 그룹 빅딜'이라는 정책 하에 LG가 반도체 사업을 포기하고 이를 현대에게 몰아준 결정이었다.

당시 정부가 은행 대출 중단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기에 LG의 강력한 반발을 묵살하고 추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현 시점에서 정부가 리벨리온-퓨리오사의 합병을 강제할 수단은 전혀 없다. 자칫 배임이나 재산권 침해 등 법적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

다만 국민성장펀드라는 대체 수단을 활용해 볼 수는 있다. 정부가 150조원 규모로 조성한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AI 반도체 기업들에게 "합병해서 덩치를 키우고 경쟁력을 입증한 곳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식으로 기업 움직임을 유도할 수 있다. 정부 주도의 AI 데이터센터 구축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다는 당근도 고려해볼 수 있다.

국민성장펀드는 이미 리벨리온에 3000억원 투자를 약속한 상태다. 향후 퓨리오사 투자까지 성사시켜 두 회사의 주주로 등재된다면 리벨리온-퓨리오사 합병이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

물론 정부 주도의 합병보다는 기업들이 스스로 필요성을 느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다. 두 회사에 중복 투자한 투자자들이 투자금 회수를 위해 몸집을 불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먼저 합병을 요구할 수도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산 칩이 좋긴 하지만 회사가 너무 작아서 사후 지원이나 물량 공급이 불안하다"는 피드백을 지속적으로 준다면 리벨리온과 퓨리오사 경영진들의 생각도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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