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24. 문승수
광주농업학교 5학년 시절 문승수. 문승수 외손자 이상명씨 제공
광주특별시 동구 학동 전남대학교병원 응급실 인근에는 오래된 이상명내과가 있다. 병원 벽면에는 ‘애국지사 문승수 선생’을 소개하는 동판이 걸려 있다. 동판의 마지막에는 선생이 병원장의 친외조부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외손자가 오랫동안 잊힌 독립운동가의 삶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문승수는 1905년 1월 21일 완도군 군외면 대야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승호(升鎬), 승수(升洙)는 자(字)였다.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 문백수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여섯 살부터 사서삼경을 익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총명했다.
완도는 일찍부터 항일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소안도와 고금도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이 활발했다. 특히 소안도는 독립운동가가 감옥에 갇히면 주민들이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항일의지가 강했다. 이러한 지역 분위기는 문승수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923년 4월 광주농업학교에 입학한 문승수는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여줬다. 최근 확인된 학적부에 따르면 1학년 때 38명 가운데 6등이었고, 2학년과 3학년 때는 연속으로 수석을 차지하였다. 4학년 때에는 조부의 병간호와 장례 등으로 결석이 많아 성적이 떨어졌으나 5학년 때 다시 상위권에 올랐다. 그는 학업에 정진하면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항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문승수가 입학하기 직전인 1923년 3월 광주농업학교에서는 대규모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농업학교 졸업자에게 일반 중학교와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식민지 교육제도의 차별에 항의했다. 결국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수업연한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리는 학칙 개정을 이끌어냈다.
문승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광주에서는 강석봉 등이 이끄는 청년운동이 활발했다. 문승수는 강석봉의 동생 강해석을 통해 사회과학 문헌을 접했고, 광주농업학교 안에 비밀 독서모임인 약진회(躍進會)를 조직했다.
약진회는 단순 독서모임이 아니었다. 학생들이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연구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비밀결사였다. 결성 시기와 전체 회원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성진회 결성 이전부터 광주농업학교에서 조직적인 학생운동이 전개됐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은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했다. 장재성·왕재일·박인성 등과 함께 문승수도 조직에 참여했다. 당시 판결문에는 최규창의 하숙집에 모인 결성 참여자 가운데 문승수의 이름이 명확히 등장한다.
성진회는 1927년 초 해산됐지만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 독서회 형태로 조직이 재건됐다. 재판 기록에는 김재룡이 문승수의 권유로 사회과학 연구에 참여했다는 진술이 나온다. 문승수가 약진회, 성진회, 독서회로 이어지는 비밀결사의 중심인물을 알 수 있다.
1928년 2월 졸업을 앞둔 문승수와 최규창·임종근 등은 강해석과 함께 모여 항일운동을 계속할 것을 다짐했다.
이러한 사실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28년 3월 광주농업학교를 졸업한 문승수는 그해 4월 완도 고금면 조약도에 있는 사립약산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약산학교는 주민들이 곡물을 모으고 김 양식으로 얻은 수익금을 보태 설립한 학교였다. 이곳에는 이미 민족교육에 힘쓰던 박성래와 정남균이 있었다. 특히 정남균은 문승수와 함께 성진회 활동에 참여한 동지였다.
문승수는 이들과 함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교육활동마저 탄압하였다. 1928년 10월 박성래와 정남균이 체포돼 처벌받았고, 이듬해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경찰은 배후조직을 추적했다.
1929년 12월 체포된 문승수는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인 대구복심법원에서는 1931년 6월 13일 징역 1년으로 감형됐다.
당시 신문은 검사들이 중형을 구형하자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오히려 크게 웃었다고 보도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청년들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출옥한 문승수는 고향 완도로 돌아와 농민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전남 농촌은 일제의 수탈과 경제적 궁핍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완도와 해남의 농민운동가들은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문승수는 산하조직인 완도군 농민조합건설위원회에서 재정 책임을 맡았다. 학생 시절부터 쌓아온 조직활동의 경험을 농민운동으로 확장한 것이다.
1934년 2월 전남운동협의회의 활동이 드러나면서 일제 경찰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완도·해남·강진·영암·장흥 등에서 558명이 검거됐고 문승수도 다시 체포됐다.
일제는 농민운동을 공산주의 비밀결사 사건으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 등을 적용했다. 장기간의 조사와 재판 끝에 1936년 12월 28일 문승수에게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됐다.
성진회 결성 사진. 오른쪽 푸른 원이 문승수. 문승수 외손자 이상명씨 제공
두 차례에 걸친 투옥은 그가 학생운동에서 농민운동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지속적으로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출옥 후 문승수는 일제의 감시 속에서 선박을 이용한 운송사업에 종사했다. 사업으로 축적한 재산은 독립운동 지원과 어려운 주민들을 구휼하는 데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 8월 15일, 문승수가 평생 바라던 해방이 찾아왔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해방정국은 극심한 좌우 이념대립에 휩싸였다.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과 교류하며 공동의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경력이 오히려 문승수를 공격하는 구실이 됐다.
그의 활동을 관통한 것은 특정 이념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실천이었다. 하지만 독립운동 경력은 해방 이후 이념적 낙인으로 돌아왔다.
1949년 문승수는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보도연맹 관계자들을 예비검속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50년 7월 16일 문승수는 완도 군내리의 집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이튿날 다른 연행자들과 함께 완도 제1부두에서 장영호에 실렸다. 배에 실린 50~60명은 목포 앞바다에서 전남경찰국 경비선 금강호로 옮겨졌다. 이후 흑산도 근해에서 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제적등본에는 문승수의 사망일이 1950년 7월 20일로 기록돼 있지만 실제 희생 날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제의 감옥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국가폭력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남겨진 가족들은 그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다.
문승수의 삶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게 한다. 그는 약진회를 조직하고 성진회와 독서회 활동에 앞장섰다. 교사가 되어서는 민족교육을 실천했고, 출옥 후에는 농민운동을 통해 일제의 수탈에 맞섰다.
문승수는 평생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그의 이름을 되찾는 일은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리는 동시에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승수의 생애를 집대성한 『문승수 평전』 출판기념회가 오는 10월 30일 광주 전일빌딩245에서 열린다. 박해현 교수가 집필한 이 평전은 판결문과 당시 신문기사, 광주농업학교 학적부, 유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문승수의 항일운동과 비극적인 최후를 추적했다.
문승수가 평생 지키려 했던 것은 민족의 독립과 인간다운 삶이었다. 오늘 우리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 하는 이유이다.
차솔빈기자 ehdltjstod@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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