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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대구의 뿌리를 찾아서] 대자연 속 비슬산 기슭 사람들, 참사람...

생성형 AI 생성 이미지. 얼(넋)이란 낱말 풀이로는 '정신적 줏대(the mental center pillar)'다. 정신적 줏대가 없이 경거망동하는 사람들을 세칭 '얼빠진 좀비'라고 한다. 이런 '얼을 담았던 그릇(꼴)'을 고대어(통일신라 이전)...

[대구의 뿌리를 찾아서] 대자연 속 비슬산 기슭 사람들, 참사람...

(20) 유가(瑜伽)에선 얼(魂)과 꼴(禮)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얼은 낱말 풀이로 ‘정신적 줏대’

중세어 ‘얼골’→조선시대 ‘얼굴’

영조조 이후 의미 축소 통해 ‘낯’

최근에는 ‘체면’·‘신망’으로 사용

비슬산에 봄이 찾아오고 유가가 평화와 풍요를 복숭아 꽃 미소로 드러내면 개울은 우렁찬 소리로 화답하는 듯한 모습을 그린 이미지. 생성형 AI 생성 이미지.

얼(넋)이란 낱말 풀이로는 ‘정신적 줏대(the mental center pillar)’다. 정신적 줏대가 없이 경거망동하는 사람들을 세칭 ‘얼빠진 좀비’라고 한다. 이런 ‘얼을 담았던 그릇(꼴)’을 고대어(통일신라 이전)에서는 ‘얼꼴(身體)’이라고 했다. 물론 ‘영혼의 모습(the appearance of the soul)’이란 의미도 담고 있었다. 중세어(高麗語)에선 ‘얼골(身體)’이라고 했다가 조선 시대 들어와서 ‘얼굴(身體)’로 모음조화(母音調和) 현상이 나타났으며, 영조조(英祖朝) 이후 의미축소(意味縮小)를 통해서 오늘날 ‘낯(面, face)’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에는 얼굴이 체면(體面), 신망(信望) 등으로 중국어 ‘미엔즈(面子)’와 같은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중국인들은 ‘미엔즈(面子, 體面)’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항우본기(史記 項羽本紀)’에선 초나라 패왕 항우(項羽)가 백전백승(百戰百勝)했음에도 해하전투(垓下戰鬪)에 한 번 대패(大敗)하고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고사를 남기고 자결했다.

요사이는 ‘얼굴(面)’이나 ‘낯(顔)’이라는 말보다 “쪽(面, page)”이라는 말로 대용한다. 즉 ‘쪽팔리다(loseface).’, ‘쪽까이다(lose face)’ 혹은 ‘쪽당한다(be embarrassed)’ 등으로 사용한다. ‘얼빠지다’라는 의미로 “꼴값한다” 혹은 “육갑 떨다”는 말을 쓴다. 이와 반대로 ‘페이스북(Facebook)’을 우리말로 ‘얼책(Facebook)’,‘얼숲(Facebook Forest, 혹은 얼š’ 혹은 ‘얼친(Facebook Netizen)’이라고 중세어(中世語)로 되돌리고 있다. 최근 ‘즐거운’이란 단어보다 상호 등에서는 ‘라온’이란 고대어를 되찾아 사용하고 있다.

비슬산(琵瑟山) 자락 산자수려(山紫水麗)한 대자연 속에 살아왔던 비슬산(琵瑟山) 기슭 사람들은 “얼과 꼴이 하나 된 참사람(眞人), 혹은 선인(仙人)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를 알 법도 한데 언제나 찾아올 때마다 느낌을 ‘비슬산(琵瑟山)에서’라는 시에 담아 본다. “이곳엔 산천이 마음을 맑게 하고, 낮에는 햇살과 윤슬이 반짝이며, 밤엔 별과 꽃들이 소곤거리니, 상처(傷處)는 별이 되고 근심은 웃음이 되데. 누군가 말했지. 비슬산(琵瑟山) 기슭에 살아보라고. 아침놀에 이슬마저 눈물겨운 감탄(感歎)이네.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비슬산(琵瑟山) 진달래는 나들이객들의 얼굴에 웃음이 되고, 왁자지껄 펼친다. 비슬산(琵瑟山) 산천(山川)과 사람들이 하나 되어. 그래서 유가(瑜伽) 비슬산을 보고 죽으라고 했던가?”

졸시(拙詩)를 본 작곡가 친구가 “비슬산에서(트로트 가사)”라는 노래를 지어주었다.

◇비슬산 구성(苞山九聖)뿐만 아니라 1천인을 배출할 유가성지.

비슬산(琵瑟山)의 옛 이름 포산(苞山, 包山, 혹은 佛山)이 배출한 9명의 성인(聖人, 국사, 대사 등 큰 스님)을 유가에서는 포산구성(苞山九聖)이라 한다. 관기(觀機), 도성(道成), 반사(搬師), 첩사, 자양(子陽), 도의(道義), 성범(成梵), 금물녀(今勿女), 백우사(白牛師) 등이다. 향토 사학자들도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정도만 알 뿐이다. 지금도 도성암(道成庵)이 있으니, 어디선가 어떤 모양으로 관기암(觀機庵)은 있다. 보각국사(普覺國師)는 이곳 비슬산 유가성지(瑜伽佛敎聖地)에서 1천 명 성인(聖人, 일명 큰 스님)이 배출된다(待山中一千人出世)고 예언을 적어놓았다.

그래서 인지 오늘날까지 유가읍에 있는 사찰을 기억 나는 것만 손꼽아도 대견사(大見寺), 유가사(瑜伽寺), 소재사(消災寺), 용화사(龍華寺), 도성암(道成庵), 모은사(慕恩寺), 수도암(修道庵), 관음정사(觀音精舍), 장원사(藏原寺), 천수암(千手庵), 금수암(金水庵), 사효암(思孝庵), 성포암(聖布庵) 등이 있다.

유가읍 휴양림길 232번지에 해발 1천m에 통일신라 9세기 헌덕왕(憲德王, 재위809~826) 때 건립되었다고 추정되는 대견사(大見寺)가 있다. 사찰 명칭을 두고 “당나라 문종(文宗, 재위 809~840) 황제의 세면대에 천하제일비경(天下第一秘境)이 비춰 그곳을 찾으라는 하명(下命)에 해동조선국(海東朝鮮國)의 산천을 다 뒤집어 찾은 결과는 이곳이었다.”고 해서 ‘대국에서도 보이는 비경에 있는 사찰(大國見寺)’이라고 했다가 대견사(大見寺)로 정착되었다. 당시 사대봉사(事大奉仕)의 정신(精神)에서 해명했다.

2016년 법희(法熙) 스님의 해명은 “작은 나라가 황제 대국을 섬기는 건 도리다(以小國, 事大皇國是, 當然道也). 그러나 불교적 해석은 크게 눈을 뜨고 본다면 보다 큰세상을 본다(大開眼則, 見大世界)라는 의미다. 대자대비(大慈大悲)의 견지에서는 큰 세계를 보자(大慈大悲, 見大世界)는 표현이다. 한 마디로 팔정도(八正道)에서 바르게 봄(定見)이다”라고, 특별히 설법(說法)을 해주셨다.

고려 시대 1227(고종14)년 22살에 승과에 장원 급제한 일연(一然)스님이 초임 주지로 임명되었던 곳은 대견사였다. 10년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신비스러운 일이 이곳에 몇 차례 생겨났기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장육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에 땀이 흘렀다(丈六觀音出汗)고 조정에 2차례의 보고, 1416(태종16)년 2월 29일자와 1423(세종5)년 11월 29일자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폐사된 사연과 연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으나 1900(광무 4)년 영친왕이 즉위하자 축하하기 위해 이재인이 중창했다가 1908(융희 2)년에는 허물기 시작했고, 1917년 조선총독부에 첩보가 올라왔는데, 동화사 주지 김남파(金南波)가 “대견사가 일본 대마도의 기세를 억압한다.”는 풍수지리적인 주장을 했다. 이를 빌미로 대견사 폐사 청원이 있자 6월 23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제1466호에 ‘동화사 말사인 대견사 폐지를 6월 20일자로 허한다’가 게재되었고, 곧바로 폐사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몇 차례 대견사지(大見寺址)를 찾았으나 황량함만 느꼈다. 다행스럽게 2002년 문화재 발굴 작업으로 출토된 암막새 기와에 ‘대견사(大見寺)’ 명문(銘文)이 확인되었고, 그 와편(瓦片)에 만력 39(1611)년과 승정 6(1633)년의 연호(年號)가 나왔기에 1633년까지 사찰로 명맥을 유지해 왔음을 짐작했다. 대견사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로는 i) 절터에 남아 있던 거대한 기둥 받침돌(柱礎) 용도의 석축으로 보이는 길이 37.5m, 높이 6.56m나 되는 석축이 있었다. ii) 동서쪽의 단애암벽(斷崖巖壁)을 이용해서 석축을 쌓고, 평탄지면(平坦地面)을 조성해 대견사를 지었다. iii) 중앙부는 상하좌우 흙의 힘(土壓)으로 밀린 현상(을 보여주었다. iv) 주변 석축은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암을 막돌로 ‘허튼 층 쌓기’를 했다. 다행하게도 석축작업(石築作業)에 일본 정통 석축 기법인 ‘들여쌓기’가 없었다.

그럼 폐사(弊寺) 이후에 97년 만인 2013년 11월 본사 동화사(桐華寺)가 스리랑카 쿠루쿠테사원에서 진신사리(眞身舍利), 이를 대견사에 모시기로 결정했다. 2014년 3월 1일에 1,001m( 天下第一)에 대견사(大見寺)를 신축했다. 삼층석탑, 석축, 우물, 마애불 등이 남아 있던 절터(寺址)에 부지면적 3천633㎡, 건축면적 186㎡의 대견보궁(大見寶宮), 선당(禪堂), 종무소(宗務所), 산신각(山神閣) 등 4동을 건축했다. 이곳에서 최근 국내 영화 및 드라마를 촬영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16년 11월 드라마 ‘옥중화(獄中花)’에서 대견사 삼층석탑이 방영되었다.

섬유패션도시 대구광역시의 상징 마크로 도입된 ‘패션이’.

그 탑은 통일신라 후기(統一新羅 後期)에 조성된 9층 석탑(九層石塔)이었으나 현재 3층만 남아 있어 3층 석탑(三層石塔)이다. 1994년 4월16일 유형문화제 제42호로 지정, 대견봉에서 남동쪽으로 2km 정도 대략 해발고도 1천m, 기단과 탑신의 비례감 혹은 균형감에선 적어도 9층 정도는 되었다. 당시 통일신라 호국불교의 “진취적 신라기상(9층)”과 “황제국의 완성(10층)”의 황룡사 9층목탑(皇龍寺 九層木塔)을 위시하여 9층 석탑(九層石塔, 주변 9개국을 신라제국으로 통합)을 만들었다. 해발고도 1천m의 고산지대에서 채취했던 암벽 판절석(巖盤板折石) 바닥에 2층 기단 3층만 남아 있다. 하층 기단석에는 양쪽 모서리와 가운데 기둥문양(柱文)이 양각되어 있고, 또한 위층 기둥 돌(柱石)과 몸돌(塔身石)에도 양쪽 모서리에 주문 양각이 있어 소박하면서도 최선을 다했다. 갓돌(冠石)에 4단의 지붕받침(宇盤)과 2단의 고임(支撑)을 조각했다. 전체적으로 2000년 3월 3일 대구시가 캐릭터로 지정한 ‘승천하는 패션이’를 연상시키고 있다. 1988년 달성군에서 높이 3.67m의 3층 석탑으로 복원했다. 세월의 무게와 아픔을 간직한 채 당당하게 견지함은, 앞에 보이는 옥녀봉(玉女峰)에 삼층석탑이라도 구층석탑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글=김도상 행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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