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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대구의 뿌리를 찾아서-달성군] (25)사문진(沙門津) 나루터에 비장 된 신비(神秘)...1900년 사문진 선착장 통해 국내 최초 피아노 들어와

사문(沙門)은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 도를 닦는 사람 곧, 출가한 승려”라고 낱말 풀이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다.

화원에 왜 안양정토로 들어가는 사문이 있었을까. 여러가지 설이 존재한다. 생성형 AI 생성 이미지.

사문(沙門)은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 도를 닦는 사람 곧, 출가한 승려”라고 낱말 풀이를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다.

인도 철학사상에서는 슈라마나(Sramana) 철학사상을 통칭하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사마나(sramana)’를 한자음을 빌려 사문(沙門)으로 적었다. 오늘날 현실에서 ‘모래가 많은(沙) 나룻터(門)’라고 해석하는 향토 전문가도 있고, 또한 인흥사지(仁興寺址)만 남아 있지만 과거 인흥사로 들어가는 사문(寺門)이었는데 모래가 쌓이자 사문진(沙門津)이라고도 해설한다. 현실에 기반한 해설이다.

그러나 과거 어느 시점에서 이곳에다가 ‘사문(沙門)’이라는 불교 명칭을 붙인 이유는, i)‘화원(花園)’을 ‘사르마트 사슴 동산(鹿野園)’ 혹은 ‘룸비니 동산(Lumbini Garden)’으로 여겼고, ii) 화원(花園)에 들어오는 것을 안양정토(安養淨土)에 들어가는 사문(沙門)에다가 비유했다는 역사적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까지 사문진(沙門津)으로 부르는데 한마디로 경이감(驚異感)과 신비성(神秘性)을 제공하고 있기에 명실상부(名實相符)하다.

역사적 타임라인(historical timeline)을 현대에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문진(沙門津)에는 1960년대까지 장마철 우수기를 이용해 부산(釜山)의 소금 배가 안동(安東)까지 주운(舟運)할 때 중간 나룻터였다. 1932년 이규환(李圭煥) 감독이 이곳 사문진(沙門津)에서 35㎜ 흑백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A boat without a master)’를 촬영할 당시엔 미국의 헐리우드처럼 영화의 메카로 부상했으나 영화 필름은 현재 광주시립세계영화박물관(光州市立世界映畵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임자 없는 나룻배, 달성문화전자대전 : “유신 키네마사가 제작한 35㎜ 흑백 무성 영화로 1932년 9월 18일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하였다. 개봉 후 큰 인기를 얻었으나 조선 총독부에서 영화 내용 중 반일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일부를 삭제하였다. 원작·각본·감독을 맡은 이규환(李圭煥)이 일본에서 영화를 공부한 후 귀국하여 제작한 첫 작품이자 대표작이다. 주인공인 나룻배 사공의 춘삼 역은 나운규(羅雲奎), 그의 아내 역은 김연실, 딸 역은 문예봉이 각각 맡았다”)

1900년 3월 26일 부산(釜山)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사문진(沙門津)에 도착한 미선교사(宣敎師) 사보담(史保淡, Richard H. Sidebotham, 1874~1908)이 ‘귀신통(鬼神桶)’이라는 오늘날 피아노(piano)를 선착장에 내려 20여명의 짐꾼들에 의해 4일 만에 대구시 중구 종로(鐘路)로 옮겼다.(史保淡(Richard H. Sidebotham, 1874~1908) : “사보담은 목사로 임명된 후 미국북장로교의 해외 선교사로 파견되어 부인인 에피 앨든 브라이스(Effie Alden Bryce·1876~1942)와 함께 1899년(고종 36) 한국으로 들어왔다. 사보담 부부는 1899년 11월 23일부터 1900년(고종 37)까지 대구 지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고 이후 부산 지부로 옮겨 1907년(순종 1)까지 7년 동안 열정적인 선교 활동을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1900년 3월 26일 부산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화원의 사문진(沙門津) 선착장[현 화원 유원지]으로 국내 최초의 피아노를 들여왔다. 이 피아노를 짐꾼 20여 명이 사흘간 대구 중구 종로의 사보담 부부 집으로 옮겼는데, 당시 이상한 소리가 나는 물건이라고 해서 ‘귀신통(鬼神桶)’으로 불리었다”)

1861(철종 12)년 김정호(金正浩, 1804~1866)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밑바탕이 된 1736년에서 1767년 사이에 제작된 여지도(輿地圖)에서는 달성군의 나룻터로 사문진(沙門津), 달천진(達川津, 과거 해랑교 인근), 답곡진(畓谷津, 일명 水門津)과 마정진(馬丁津)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시대 때부터 사문진(沙門津)은 생활 필수용품의 교역중심지였다. 가야 시대는 덩이쇠(鐵釘)를 신라때는 일본에 창, 칼, 갑주(甲胄), 마갑(馬甲) 등의 철제병기(鐵製兵器)의 주운교역지(舟運交易地)였다. 아예 왜물고(倭物庫)가 크게 번창했다.

물론 신라 비단교역(緋緞交易)에서도 사문진(沙門津)은 청해진(淸海鎭)과도 연계했던 지역중심지였다. 화원(花園)의 들판을 적시는 농업용수를 살펴보면, 천내천(川內川)은 비슬산(毗瑟山 혹은 琵瑟山)에서 발원하여 본리(本里)와 화원읍 소재지 남서쪽으로 화원유원지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명곡천(椧谷川)과 설화천(舌化川)도 쌀밋들(米穀野)의 일부인 설화들(舌化野)을 거쳐 낙동강으로 유입하고 있다.

◇중세와 근대문화의 인큐베이터로서의 화원(花園, Flower Bed)!

화원(花園)에선 명불허전(名不虛傳)임을 늘 실감한다. 인흥서원에서는 추적 선생이 쓴, 인간으로 인간답게 살아가는 윤리교과서인 ‘명심보감(明心寶鑑)’이란 거울로 스스로를 들여다 보게 된다. 또한 광거당(廣居堂)이란 당호(堂號)가 “이 세상에 살 바에는 가장 넓은 곳에서 살아보자. 이 세상에 가장 바른 자리에 서며, 이 세상에 가장 큰 도를 행하라... 뜻을 얻지 못해도, 혼자서 옳은 길을 가야 한다...부당한 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아니함이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라는 맹자(孟子)의 말은 흐리멍텅하게 살아온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다가온다. 대장부의 삶을 살았던 수봉(壽峰) 문영박 독립지사의 삶을 관조하니 이곳이 바로 ‘휴먼라이브러리(Human Library)’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남평문씨 세거지 인흥마을에 대해 많은 분께서 언급했기에 여기서는 정보화시대에 의미만을 요약한다. 19세기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 1812~1874)께서 인흥(仁興)마을을 택리하여 남평문씨 세거지를 형성했다. 광거당(廣居堂, 향토문화전자대전 : “광거당(廣居堂)은 1872년(고종 9) 후은공(後隱公) 문봉성(文鳳成, 1854~1923)이 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쌓기 위한 교육 장소로 지었던 4칸 초가집을 헐고, 1910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조선 후기의 이름난 서화가이자 문신인 석촌 윤용구(尹用求, 1853~1939)의 친필 ‘광거당(廣居堂)’이라는 편액이 전면에 걸려 있었다. 광거(廣居) 맹자의 ‘이 세상에 살 바에는 넓은 곳에서 살아야지(居天下之廣居)’ 라는 구절에서 차용했다. 마루 바깥쪽에 수석노태지관(壽石老苔池館), 안쪽에 고산경행루(高山景行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을 원천(源泉)으로 수봉정사(壽峰精舍) 수봉정사(壽峰精舍, 향토문화전자대전 : “화원읍 본리리(南平文氏世居地) 일제강점기 건립된 정사(壽峰精舍)로 i) 남평문씨(南平文氏) 수봉(壽峰) 문영박(文永樸, 1880~1930)을 기리고, ii) 후손의 육영사업 장소였다. 수봉정사(壽峰精舍)는 1936년 문시채(文時采) 등 문영박의 자제들이 건립했다. 유창환(兪昌煥)이 쓴 수백당(守白堂) 등의 현판과 개항기 문장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擇榮)의 글씨 판각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인수문고(仁壽文庫)까지 3대 후생가외사업(後生可畏事業)이 오늘날 ‘지역사회 휴먼 라이브러리(co㎜unity human library)’ 모델을 만들었다.

가장 간략하게 설명해 주신 상희구(尙喜久) 시인의 글을 옮기면 “처음엔 문중 자제들의 학문과 교양을 닦던 수양 공간으로 광거당(廣居堂)과, 수봉정사(壽峰精舍)를 세웠는데, 수봉정사(壽峰精舍)는 나중에 크게 확대되어 인수문고(仁壽文庫, 국내최대문중문고, 대구시역사문화대전 : “화원읍 본리리에 있는 3대 100년에 걸쳐 완성된 국내최대의 문중문고. 인수문고(仁壽文庫)는 약 200여 년 전부터 인흥 마을에 세거지를 형성한 남평 문씨 가문이 3대 100년에 걸쳐 고서를 모아 만든 국내 최고의 문중문고이다. 현재 인수문고는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 1812~1874)의 손자와 증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 1854~1923)과 수봉(壽峯) 문영박(文永樸,1880~1930)부자가 세운 광거당(廣居堂)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1910년에 광거당을 짓고 본격적인 서적의 수집과 교육 등을 통해 후진 양성과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의 발로로서 민족의 역사와 문자[글] 등을 보존하고자 했다. 전문가들의 회의를 통해 구입할 서적을 선정하면, 국내외를 망론하고 자금을 마련하여 서적을 구비하였다. 1975년 1만권이 넘고부터 ‘인수문고소식(仁壽文庫小識)’라고 발행하고 부터, 현재는 약 2만 권에 이를 정도의 방대하고 다양한 서적과 고문서가 수집되었는데, 철저한 보관 관리를 통해 서적의 낙질이 없고, 상태도 깨끗한 것이 특징이다”)로 발전했다. 1만 권의 진귀한 장서를 갖추게 되자 희귀도서를 빌려주는 지역사회는 물론 전국의 유명한 학자와 문인들이 책객(冊客)으로 신세를 졌다.”

즉, 소위 ‘명문귀족의 도의적 의무((Noblesse oblige)’라는 정자나무 한 그루가 지역사회(地域社會)와 나라 전체에 그늘막을 제공했다.

글=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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