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법 마비·법인계좌 봉쇄 속 은행·증권사 디지털 영토 전쟁 가열
지난 4일 서울 여의도 코인원 사옥에서 열린 ‘코인원·한국투자증권·OKX·컴투스홀딩스 공동 기자간담회’ 모습. 왼쪽부터 송병준 컴투스홀딩스 의장과 김성환 한국투자증권 대표이사, 차명훈 코인원 대표, 스타 쉬 OKX 대표. 사진=OKX
[주간한국 조채원 기자] 은행·증권 등 전통 금융사들이 가상자산 거래소 지분 확보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실제 규제 환경과는 온도차를 보이고 있다. 연초 금융당국의 전향적 선언에도 증시 호황과 6·3 지방선거 여파로 제도화는 공백기에 갇혔고, 올 하반기 입법 전망마저 불투명하다.
◇금가분리 빗장 풀리자…전통 금융사 가상자산 인프라 선점 경쟁
전통 금융사들의 가상자산 인프라 확보 전쟁은 올해 들어 자본 시장의 가장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달 29일 여의도 코인원 본사에서 코인원·OKX벤처스·컴투스홀딩스와 전략적 지분 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투자로 한국투자증권은 코인원 지분 20%를 취득해 공동 3대 주주로 올라섰다.
김성환 한국투자증권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4일 기자 간담회에서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가 아니라 제도권 금융과 가상자산 시장을 잇는 허브 역할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라며 “토큰증권·스테이블코인 법제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해 직접 지분 인수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움직임은 전방위로 확산 중이다. 하나금융그룹은 하나은행을 통해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 지분 6.55%를 약 1조 33억원에 인수해 4대 주주에 올랐다. 삼성증권·삼성SDS·삼성카드도 두나무 지분 4%를 6128억원에 취득하기로 결의했고, 한화투자증권은 지분율을 9.84%까지 확대했다. 미래에셋그룹은 미래에셋컨설팅을 통해 코빗 지분 92.06%를 확보, 최대 주주에 올라 현재 공정거래위원회 기업결합 심사를 받고 있다.
국내 인프라 선점을 넘어 글로벌 규제 금융망과 연대를 통한 우회로 모색도 포착된다. 신한금융그룹은 지난 4일 신한자산운용·신한투자증권을 필두로 글로벌 기관용 블록체인 단체인 캔톤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20%’ 뒤에 숨은 진짜 목표, 스테이블코인
대형 증권사들이 가상자산 거래소 지분을 매입할 때 정확히 20% 이하로 지분율을 맞추는 배경에는 정교한 규제 회피 전략이 숨어 있다. 금융위원회 등 규제당국은 가상자산 거래소를 공적 금융 인프라로 취급, 특정 금융 자본의 독점을 막기 위해 ‘대주주 지분율을 15~20% 수준으로 제한하는 소유 규제’ 법제화를 물밑에서 검토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당국의 족쇄에 걸리지 않기 위해 기업들이 지분율을 절묘하게 맞추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고 귀띔했다.
증권사들이 이처럼 까다로운 지분 제한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거래소 장부에 이름을 올리는 진짜 이유는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수수료라는 단기 이익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노리는 궁극의 수익 사업은 스테이블코인·실물연계자산(RWA) 기반 디지털 통화·결제권 장악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코인 가치만큼 원화 현금을 담보로 예치해야 한다. 향후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이 수조원대로 커질 경우 이 담보금을 단기 채권 등으로 운용해 막대한 이자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주체는 제도권 금융사뿐이다. 나아가 증권사들이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이 거래소 생태계의 기초 통화로 정착되면 주식이나 토큰화 자산을 거래할 때 은행망을 거치지 않고 24시간 실시간 결제·청산이 가능한 독자적 금융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이는 그동안 은행권이 독점해 온 금융 결제권을 증권업계가 분점하는 계기가 된다.
◇입법 마비·증시 호황…가상자산기본법 논의 동력 실종
금융사의 장밋빛 청사진과 달리, 올 하반기 제도화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1단계) 이후 발행·유통 규제를 다룰 ‘2단계 디지털자산 기본법’ 입법 논의는 사실상 전면 중단된 상태다.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지난 4월부터 국회 내에서 기본법 논의와 관련해 들리는 소문조차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알 수 없는 마비 상태”라고 말했다.
최근 국내 증시의 이례적인 대폭등이 가상자산 입법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뒤로 밀어냈다는 분석이다. 최화인 에반젤리스트는 “최근 국내 증시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면서 시장의 자본이 증시로 몰리는 상황에서 정부가 가상자산 규제를 완화해 증시 대기 자금을 코인 시장으로 유출시키는 풍선효과를 바랄 리가 없다”며 “지난해 말이나 올해 초와 달리 가상자산 입법의 정무적 우선순위는 처참하게 밀려난 구조”라고 진단했다.
정부가 연초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약속했던 가상자산 현물 ETF 연내 도입 역시 구호에 그치고 있다. 업계와 금융당국 규제에 정통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연초 정부 발표 이후 관련 논의가 완전히 쏙 들어간 상태”라며 “업계에서는 올 하반기 중 승인이 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만 가지고 있을 뿐 상반기 내내 다른 거시 경제 이슈에 밀려 실질적인 정책 진전은 전무했다”고 털어놨다.
◇“법인계좌·헤지 인프라부터 풀어야”…제도 공백이 발목
전문가들은 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선 디지털자산 기본법 통과와 더불어 법인·기관투자자의 가상자산 계좌 개설 금지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조진석 코다 대표는 “법인의 가상자산 소유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 거래소에서 법인 명의 실명 계좌가 열리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금융위가 2017년 내린 자금세탁방지 행정 지침을 은행들이 관성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조 대표는 이어 “법인 거래를 막는 국가는 중국·북한·한국 정도뿐”이라며 “정보력·자금력을 갖춘 법인 참여를 유도해 ‘김치 프리미엄’ 등 시장 왜곡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권사의 헤지(위험 분산) 수단 부재도 치명적이다. 미국 증권사들은 시카고상품거래소(CME) 비트코인 선물로 리스크를 관리하지만 한국은 가상자산 선물 시장이 전무하다. 업계에선 “현물 ETF를 도입하려면 공인된 증권사에 한해 CME 선물 거래 특례를 허용하거나 기관 전용 장외 헤지 시스템 구축을 위한 규제 샌드박스를 열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조채원 기자 cwlight22@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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