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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단순 실행자에서 설계·감독자로 승격한 인간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용 로봇 밀도, 정밀 제조 공정 기술, 반도체 경쟁력은 분명한 자산이다. 특히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AI 연산의 병목을 해소하는 핵심 기술이다. 이번 증시 랠리의 또 다른 축 역시 반도체 강점에 대한...

단순 실행자에서 설계·감독자로 승격한 인간

[홍준표의 경제 파인더] 피지컬 AI, 생산성 혁명 2.0의 서막

반도체·로봇 등 강력한 부품에도 ‘산업 원팀’ 구축 못한 한국

플랫폼 사용자 넘어 통합 설계 주도국 도약 전략 펼쳐나가야

현대차그룹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백 텀블링을 하는 모습. [사진 보스톤다이내믹스]

올해 초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인 ‘CES 2026’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이 공개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는 단순한 기술 시연이 아니었다. 환호가 터진 순간은 로봇이 계획된 동작을 수행한 순간이 아니라, 텀블링 착지 과정에서 균형을 잃을 뻔하다가 스스로 중심을 바로잡은 대목에서였다. 넘어질 위기를 인지했지만, 비틀거리면서 균형을 회복해 다시 서는 모습. 사전에 입력된 동작을 반복하는, 지금까지 본 익숙한 자동화 기계가 아니라, 상황을 판단하고 대응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등장한 것을 선언한 셈이다.

이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챗 GPT나 제미나이(Gemini)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텍스트와 이미지를 통해 사고를 확장했다면, 테슬라의 ‘옵티머스’나 현대차의 아틀라스 같은 피지컬 AI는 실제 환경에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한다. 이는 계획된 자동화가 아니라, 환경을 인지하고 스스로 판단해 움직이는 지능형 시스템이다. 모니터 안에서 생각하는 AI에서 실제 공간에서 행동하는 AI로의 전환. 바로 이 지점에서 산업의 작동 원리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발표 직후 현대차 주가는 급등했고, 한국 증시는 연일 최고점을 갱신했다. 시장은 미래를 선반영했다. 그러나 주가 상승은 결과일 뿐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우리는 새로운 로봇을 본 것인가, 아니면 생산성 구조가 바뀌는 신호를 목격한 것인가? 텀블링 후 균형을 회복한 그 장면은 단지 한 기업의 기술 성과가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결합 방식이 재설계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행동형 AI 등장 속 진화하는 산업 현장

생성형 AI, 이른바 LLM(대규모 언어모델) 시대가 지식 노동을 보완했다면, 피지컬 AI 시대는 육체노동을 고도화한다. 보고, 이해하고, 계획하고,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통합되면서 반복 작업과 위험한 공정을 줄이고 숙련도가 필요한 영역도 빠르게 변화시킨다. 노동의 성격이 변하고, 인간은 실행자가 아닌 설계자·감독자로 승격한다. 기술이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노동의 정의를 바꾸고 있는 셈이다.

이는 생산 함수의 구조적 재편이며, 총요소생산성(TFP)을 직접 자극하는 변화다. 경제학적으로 총요소생산성은 노동과 자본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결합하는지를 의미한다. 동일한 인력과 설비를 투입해 더 많은 산출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차이는 바로 총요소생산성이 개선된 셈이기 때문이다. 피지컬 AI는 숙련 격차를 줄이고, 품질 편차를 최소화하며, 설비 가동률을 극대화한다. 공정 간 병목을 실시간으로 조정하고, 데이터를 축적해가면서 지속적으로 학습한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닌 생산성의 질적 도약이다.

특히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국가에서는 그 의미가 더 크다. 노동 공급이 줄어드는 환경에서 성장을 유지하려면 노동의 질적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피지컬 AI는 반복적이고 위험한 작업을 흡수함으로써 노동의 한계를 보완한다. 이는 잠재성장률을 방어하는 기술적 장치이기도 하다. 코스피 6000 돌파의 이면에는 이러한 생산성 기대가 반영돼 있다. 그러나 기대가 현실이 되려면 조건이 있다. 누가 이 변화를 설계하고 표준을 장악하느냐의 문제다.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인공지능(AI) 연산의 병목을 해소하는 핵심 기술이다. 사진은 삼성전자 HBM4 제품. [사진 삼성전자]

피지컬 AI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여러 기술이 동시에 임계점을 넘으면서 비로소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게 된 결과다. 먼저 두뇌에 해당하는 AI 모델이 달라졌다. 과거의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분류하고 예측하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상황을 이해하고 계획을 세우며 다음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여기에 카메라와 라이다(LiDAR), 각종 정밀 센서가 결합하면서 기계는 주변 환경을 실시간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됐다. 보는 능력과 판단하는 능력이 동시에 진화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가상 훈련장’의 역할을 하는 시뮬레이션 기술이 급속히 발전했다. 현실 공장에서 수천 번의 시행착오를 범하는 것이 아닌 디지털 트윈 공간에서 먼저 반복적으로 학습함으로써 오류를 최소화한다. 실제 현장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치명적일 수 있지만, 가상 공간에서는 무한 반복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엣지 컴퓨팅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판단이 지체없이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됐다. 생각과 행동 사이 간극이 거의 사라진 것이다.

결국 두뇌(모델), 감각(센서), 근육(구동 기술), 훈련장(시뮬레이션), 그리고 연산 인프라(컴퓨팅)가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면서 AI는 ‘몸’을 얻게 됐다. 이 통합이 바로 피지컬 AI의 본질이다. 중요한 것은 개별 기술이 아닌 이들을 묶는 아키텍처다. 그리고 이 아키텍처가 산업 현장에 적용되는 순간 생산성은 단순한 개선이 아닌 구조적 도약을 준비하게 된다.

피지컬 AI가 생산성 구조를 바꾸는 기술이라면 다음 질문은 분명하다. 이 구조를 설계하는 주도권, 즉 아키텍처 주도권은 누가 쥘 것인가다. AI 경쟁은 더 이상 모델 정확도나 개별 제품 성능의 문제가 아니다. 생태계와 표준을 누가 장악하느냐의 문제다. 플랫폼을 가진 쪽이 규칙을 만들고, 규칙을 만든 쪽이 시장 방향을 결정한다.

피지컬 AI 생태계와 표준 선점해야

엔비디아는 이 점을 가장 먼저 간파한 기업이다. GPU라는 연산 인프라를 기반으로 시뮬레이션 플랫폼,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도구까지 수직 통합했다. 학습에서 추론, 가상 테스트에서 실제 디바이스까지 하나의 기술 스택으로 연결한다. 이는 단순한 제품 경쟁이 아닌 ‘잠금 효과(lock-in)’를 만드는 전략이다. 개발자가 특정 플랫폼에 익숙해질수록, 기업이 그 위에 설비와 소프트웨어를 구축할수록 다른 체계로 옮겨가는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표준은 그렇게 굳어진다. 마치 ‘데스크톱 PC’ 시대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가 운영체제 표준이 되자,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그 환경에 맞춰 제품을 개발했고 결국 사용자도 그 생태계에 묶였던 것과 같은 구조다. 한번 형성된 플랫폼의 관성은 기술력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반면 중국은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가격과 물량으로 시장을 넓히고, 시장을 통해 사실상의 표준을 만들어가는 전략이다. 대규모 보급은 곧 데이터 축적을 의미한다. 데이터는 다시 기술 개선 속도를 높인다. 플랫폼이 기술로만 결정되지 않는 이유다. 규모의 경제와 학습 효과가 결합되면 후발 주자도 빠르게 격차를 줄일 수 있다. 결국 피지컬 AI 경쟁은 기술력과 생태계, 그리고 규모의 전쟁이 동시에 벌어지는 다층적 패권 경쟁이다.

한국은 이 전환의 중심에 서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용 로봇 밀도, 정밀 제조 공정 기술, 반도체 경쟁력은 분명한 자산이다. 특히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AI 연산의 병목을 해소하는 핵심 기술이다. 이번 증시 랠리의 또 다른 축 역시 반도체 강점에 대한 기대였다. 그러나 강점은 곧 전략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제는 구조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은 분명한 강점과 동시에 구조적 한계를 함께 안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산업용 로봇 밀도를 보유하고 있고, 정밀 제조 공정 기술에서도 경쟁력을 지녔다. 반도체, 특히 HBM 분야에서는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자동차·조선·방산 등 복합 제조 산업에서도 높은 기술 축적을 이뤄왔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 역시 역설적으로 피지컬 AI의 내수 기반이 될 수 있다. 기술 수요는 분명하다.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2세대가 사이버 트럭 앞을 걷는 모습. [사진 테슬라 유튜브]

한국은 이처럼 강한 부품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설계하는 아키텍처 전략이 아직 선명하지 않다. 로봇은 로봇대로, 반도체는 반도체대로, 소프트웨어는 또 다른 영역으로 분절돼 있다. 피지컬 AI 시대의 경쟁은 개별 기술의 우수성이 아닌 이들을 묶는 통합 설계 능력에서 갈린다. 잘 만드는 나라와 설계하는 나라의 차이가 여기서 발생한다.

지금의 구조가 지속한다면 한국은 우수한 하드웨어 공급국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플랫폼의 규칙을 만드는 쪽은 아닐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기업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다. 생산성 구조를 누가 설계하는지, 산업 질서의 방향을 누가 정하는지의 문제다. 피지컬 AI 시대의 전략은 결국 통합 아키텍처를 국가 차원에서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다.

단순 기술 도입 아닌 전략 설계할 시점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핵심은 개별 기술 육성이 아닌 ‘통합 설계 능력’을 국가 전략으로 격상하는 것이다. 피지컬 AI는 반도체·로봇·센서·공정 소프트웨어·시뮬레이션 기술이 하나의 체계로 작동할 때 비로소 생산성을 바꾼다. 이들을 산업별로 분리해 지원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필요한 것은 기술 간 결합을 전제로 한 아키텍처 전략이다. 제조 특화 피지컬 AI, 물류 특화 피지컬 AI처럼 한국이 강점을 가진 영역에서 통합 모델을 먼저 구축해야 한다.

둘째,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강화해야 한다. 하드웨어 경쟁력만으로는 플랫폼을 만들 수 없다. 개발자가 선택하고, 기업이 의존하게 하는 개발 도구와 운영 환경이 필요하다. 반도체의 우위가 로봇 시스템 최적화로 이어지고, 공정 데이터가 AI 학습으로 축적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경쟁은 부품이 아닌 플랫폼 단위로 이뤄진다.

셋째, 피지컬 AI를 산업 정책의 중심 변수로 인식해야 한다. 이는 특정 산업을 지원하는 정책이 아닌 국가 생산성 전략의 문제다. 고령화 대응, 산업 안전, 에너지 효율, 공급망 안정성까지 연결된다. 단기 보조금이나 시범 사업으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반도체 전략이 국가 어젠다가 됐듯, 피지컬 AI 역시 거시 전략의 일부로 격상될 필요가 있다.

결국 선택은 명확하다. 한국은 글로벌 플랫폼의 사용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통합 설계를 주도하는 국가가 될 것인가다. 생산성 혁명 2.0은 이미 시작됐다. 전략 없는 낙관은 가장 위험한 대응이다. 피지컬 AI가 몸을 얻는 순간 국가 산업 구조 역시 다시 설계돼야 한다. 지금은 기술을 도입할 시점이 아니라, 전략을 설계할 시점이다.

홍준표

서울대 농경제학과 졸업 후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농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 현대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 신성장전략팀장, 고용노동부 고령화정책 TF 위원, 한국장학재단 리스크관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홍준표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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