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부-과기부 이견에 PPA 확대 무산… AI 데이터센터법 좌초
-핵심광물 92%가 국제협력 必… 中, 베이징에너지회의로 주도권
[그래픽=WEF]
세계경제포럼(WEF)의 '미래 소재 시스템'에 대한 관점은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소재가 경제의 병목이라는 것이다. 전기차, 풍력터빈, 반도체, 데이터센터, 로봇 등 차세대 산업의 근간이 되는 구리·리튬·코발트·희토류의 공급이 특정 국가에 극단적으로 집중돼 있어서다.
9일(현지시간) WEF에 따르면, 지난해 한 해에만 핵심광물에 대한 수출입 규제가 226건으로 2024년 82건 대비 세 배 가까이 폭증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구리 공급이 2035년까지 수요 대비 약 30% 부족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WEF이 150명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92%가 소재 분야 국제협력이 자사의 장기 생존에 결정적이라고 답했다.
이 와중에 중국은 내년 1월 베이징 국가컨벤션센터에서 '베이징에너지회의(Beijing Energy Congress)'를 개최하며, 100개국 이상에서 5만명의 산업 전문가와 10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을 소집할 계획이다. 15차 5개년 규획 아래 원자력·수소·재생에너지·전기화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LNG 최대 수입국이자 태양광·배터리·수소장비 글로벌 공급망의 절대 강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겠다는 전략이 노골적이다. 한국 국가관(Country Pavilion)도 참가 예정이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에너지 공급망의 기초 체력을 다지는 정책 하나 제대로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WEF 글로벌 리더 설문(n=150)에서 소재 관련 과제를 '중대' 또는 '매우 중대'로 평가한 비율. 접근성·생산성·지속가능성 세 영역 모두 3년 전 대비 향후 3년간 19~34%p 상승이 전망된다. /자료=WEF
핵심은 AI 데이터센터 지원법이다. 발의된 6개 법안을 통합한 이 대안법은 AI 데이터센터 인허가 간소화와 함께, 재생에너지에 국한돼 있던 전력구매계약(PPA) 허용 범위를 LNG까지 확대하는 조항을 담고 있다. 당초 여야가 합의해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의결까지 마쳤다. 데이터센터·반도체 공장 등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산업 현장에서 안정적인 전원을 직접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였다.
그런데 법안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전체회의 상정 직전에 좌초했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기후에너지환경부(기후부)가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했다. 표면적 이유는 탄소 배출 증가였으나, 기후부는 비수도권 한정 허용이라는 절충안마저 일축한 것으로 확인됐다. 업계에서는 기후부의 반대가 탄소중립 논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LNG PPA가 열리면 한국전력의 전력 독점판매 체제에 균열이 생기고, 기후부 산하 에너지 거버넌스의 관할 범위가 축소되기 때문이다.
기후부는 '탄소'라는 방패 뒤에서 '한전 독점'이라는 기득권을 지킨 셈이다. 과기부는 찬성 입장이었으나 "배경훈 과기부총리가 파워게임에서 밀렸다"는 게 안팎의 평가다. WEF 관계자는 "에너지 전환과 산업 안보는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설계해야 하는 과제"라며 "특정 부처가 탄소중립을 명분으로 전력시장 개방 자체를 차단하는 구조는,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공급망 대응력을 약화시킨다"고 했다.
전 세계 49개국이 순환경제 국가 전략을 수립한 현황을 3단계로 구분한 지도. 녹색(행동 촉구)은 순환경제에 대한 국가적 대화와 조율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 주황(로드맵)은 장기 비전과 우선 정책 분야를 설정한 중간 단계, 청색(실행 전략)은 시한·책임 주체·모니터링·재원 조달까지 명시한 최종 단계를 나타낸다. 유럽 국가들이 실행 전략 단계에 가장 많이 분포돼 있는 반면, 아시아·아프리카·남미는 로드맵 또는 행동 촉구 수준에 머물러 있다. WEF에 따르면, 이들 49개국의 약 4300건 순환경제 정책 중 국제 협력을 다룬 것은 10% 미만, 무역 관련 조항을 포함한 것은 9%에 불과해 각국 전략이 자원 안보 중심으로 편향돼 있음을 보여준다. /자료=채텀하우스, WEF
문제는 이란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현실이다. WEF가 경고하듯, 다극화(多極化) 세계에서는 전통적 다자주의가 20% 넘게 후퇴했고, 실질적 성과는 이해관계 기반의 유연한 연합체, 이른바 '실행 연합'에서 나오고 있다. 중국은 베이징에너지회의를 통해 아시아·아프리카·중동과의 에너지 무역·안보 협력의 허브 역할을 자임하며 이 흐름을 선도하고 있다. 일본은 호주와 핵심광물 파트너십을 맺었다. 유럽연합(EU)은 캐나다와 원자재 전략적 제휴를 체결했다. 한국만 공급망 다변화의 제도적 기반을 놓는 데 부처 간 알력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WEF 보고서가 강조한 순환경제 관점에서 보면, 한국의 동해안 유휴 석탄화력발전소는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리튬·코발트 등 핵심광물의 30~58%가 2050년까지 순환경제 방식으로 조달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에서, 석탄화력 인프라를 LNG 전환 발전이나 도시광산 가공 허브로 재활용하는 방안은 검토할 가치가 충분하다. 동해안 석탄발전소들은 항만 인프라와 송전망을 이미 갖추고 있어, 수입 LNG 수급이나 이차전지 소재 가공 거점으로의 전환 비용이 신규 부지 대비 현저히 낮다.
WEF는 디지털 제품 여권(DPP)의 국가 간 호환성 확보, 책임 있는 광업 표준의 통합, 순환경제를 위한 무역장벽 철폐를 3대 우선 협력 과제로 제시했다. 이 세 가지 모두 한국 석유화학·배터리·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과 직결된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LNG PPA 하나를 놓고 기후부와 과기부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글로벌 기업 리더 92%가 소재 분야 국제협력을 자사 장기 성공에 '중요' 또는 '매우 중요'하다고 답했고, 87%는 국제 파트너십 강화에 '매우' 또는 '상당히' 적극적이라고 응답했다. /자료=WEF
에너지 정책은 탄소 감축과 공급 안보 중 어느 하나만 선택하는 게임이 아니다. 중국이 석탄 기저부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재생에너지 초강대국의 지위를 구축한 것처럼, 현실적 에너지 믹스의 유연성이 곧 산업 경쟁력이다. 기후부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지금 지키고 있는 것이 대기 중 탄소 농도인지, 아니면 한전을 정점으로 한 전력 독점 체제와 자기 부처의 규제 권한인지. 92%의 글로벌 기업인이 국제 소재 협력 없이는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시대에, 부처 이기주의로 기본적인 전력 조달 다변화마저 발목 잡힌다면, 대한민국의 공급망 안보는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베이징에너지회의 관계자는 "이번 회의의 전략 컨퍼런스에는 '순환자원 관리: 글로벌 성장의 기반 강화'가 별도 세션으로 편성돼 있다"며 "한국은 배터리·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중간재 가공국으로서 중국·일본·아세안과의 소재 협력 네트워크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데, 국내 에너지 정책의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면 국제 무대에서의 협상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상(理想)은 평화롭지만 현실은 폭력적'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에 필요한 것은 이상의 언어가 아니라, 폭력적인 현실을 현장에서 정면으로 마주하는 결단이다.
[뉴스로드] 최지훈 기자 jhchoi@newsroa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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