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일 오전 강릉 홍제정수장에는 지난해 가뭄 당시 기부됐던 2ℓ 생수들이 대량으로 쌓여있다. 이연제 기자
기가 막힌 재사용입니다. 생수를 다시 물로 쓴다고 합니다.
지난해 최악의 가뭄을 겪은 강릉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생수가 몰려왔습니다. 목마른 도시를 돕겠다며 보내온 고마운 물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생수 가운데 봄 가뭄에 대비해 비축했던 2ℓ짜리 약 50만 병이 이제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는 홍제정수장 침전지입니다. 직원들이 생수병 뚜껑을 하나씩 열어 물을 붓고, 빈 페트병은 재활용 쓰레기로 분류합니다. 무려 1000t입니다.
이 생수의 일생을 생각하면 코미디 같은데요. 취수하고 정수한 물을 페트병에 담았습니다. 공장에서 포장해 트럭에 싣고 전국 각지에서 강릉까지 달려왔습니다. 창고에서 한동안 가뭄에 대비해 대기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정수장으로 들어갑니다. 물이 물로 돌아오기까지 참 먼 길을...
물론 그냥 버리는 것보다는 백번 낫습니다. 남은 생수를 어떻게든 활용하려는 강릉시의 선택도 이해할 만합니다. 생각해 봐야 하는 건 생수병을 붓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50만 병이 남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재난이 발생하면 우리 사회는 일단 보냅니다. 생수도 보내고 라면도 보냅니다. 어려움을 함께 나누겠다는 마음은 귀합니다. 그러나 선의가 넘칠수록 행정은 냉정해야 합니다. 지금 무엇이 얼마나 필요한지,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는지, 이미 확보한 물량은 얼마나 되는지 신속하게 계산해야 합니다. 그래야 기부가 필요한 곳에 정확히 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50만 병은 단순히 남은 생수가 아닙니다. 재난 구호에도 ‘출구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50만개의 물음표입니다. 현물 기부를 무조건 받아 비축하는 방식이 최선인지, 필요량을 넘으면 다른 지역이나 기관으로 신속하게 돌릴 체계는 없는지 따져볼 일입니다.
지난해에는 물 한 병이 간절했습니다. 올해는 그 물을 처리하기 위해 직원들이 50만개의 뚜껑을 열어야 합니다. 가뭄은 자연이 만들었지만, 남은 생수의 처리는 결국 행정의 몫이 됐습니다.
생수는 다시 물이 되고 페트병은 재활용됩니다. 여기까지는 기가 막힌 재사용입니다. 다만 앞으로는 재사용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음 가뭄에도 똑같이 물을 쌓아놓고, 또 남은 물의 처리 방법을 고민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재활용해야 할 것은 50만 병의 생수가 아니라, 지난해 가뭄에서 얻은 경험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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