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노벨평화상의 화두는 ‘전쟁과 평화’,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었다. 수상자는 나비 필라이(85) 전 유엔(UN) 인권 최고대표였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9일(현지시간) 평화 증진과 국제법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필라이를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위원회는 필라이에 대해 “탁월한 용기와 강직함을 바탕으로 더 포괄적인 국제법 질서를 구축하는 데 앞장서 온 인물”이라며 “전쟁 범죄와 반(反)인도범죄, 집단학살 범죄가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해왔다”고 소개했다.
나비 필라이 전 유엔 인권 최고대표. 로이터=연합뉴스
위원회는 또 “전쟁과 분쟁이 증가하고, 국제법 관련 사법 기관과 단체가 정치적 공격을 받는 이 시기에 무력·폭력 없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국제법의 지배에 달려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국제법률가 필라이의 삶은 인종차별 피해자에서 국제 인권과 사법 정의의 수호자로 나아간 여정이었다. 1941년 남아공 더반의 인도계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 체제 아래서 성장했다.
남아공 나탈대에서 법을 공부한 뒤 변호사로서 인종차별에 맞선 활동가들을 변호했다. “법정의 만델라”로 불린 이유다.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석·박사를 마친 뒤 1995년 남아공 고등법원의 첫 흑인 여성 판사로 임명됐다. 만델라 대통령 취임 이후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심으로 국가를 재건하던 시기였다.
그는 활동 무대를 국제 사회로 넓혔다. 필라이는 1995년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ICTR) 판사로 선출됐고, 1999~2003년 ICTR 소장을 지냈다. 재판 과정에서 르완다 집단학살 당시 성폭력 범죄를 국제형사사법의 핵심 의제로 다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AP 통신은 “성폭력과 강간, 그리고 선전 활동이 반인도적 범죄 및 집단학살로 이어질 수 있음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2003~2008년에는 국제형사재판소(ICC) 판사로 일했다. ICC는 전쟁범죄, 반인도범죄, 집단학살 등을 저지른 범죄자를 처벌하는 곳이다. 트럼프가 “미국과,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이스라엘을 겨냥해 불법적이고 근거 없는 행동을 해왔다”며 수차례 각을 세운 기관이기도 하다.
필라이는 2008~2014년 유엔 인권 최고대표도 지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인권 침해에 목소리를 냈다. 2016~2017년에는 국제변호사협회(IBA) 전쟁범죄위원회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 반인도범죄 조사 위원장을 맡았고, 2022년에도 후속 조사단에서 활동했다. 당시 탈북민 증언과 구금시설 관련 자료 등을 검토해 “북한 수용소에서 광범위한 인권 침해가 있었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북한 당국자에 대한 ICC 차원의 수사 필요성을 검토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펴냈다.
필라이의 수상은 꾸준히 수상 열망을 드러낸 트럼프와 대비된다. 트럼프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며 스스로 수상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워싱턴포스트(WP)는 “노벨위원회는 최근 수년간 도널드 트럼프의 수상 캠페인이란 배경 속에서 수상자를 발표해 왔다”고 짚었다. 하지만 위원회는 국제법과 인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 온 필이를 수상자로 선택했다. 강대국도 국제법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환기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 관계자가 9일(현지시간) 202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한 나비 필라이 전 유엔 인권 최고대표의 사진을 휴대전화로 보여주고 있다. EPA=연합뉴스
노벨평화상은 스웨덴에서 주는 다른 노벨상과 달리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선정한다. 노르웨이 의회가 선출한 5명의 위원이 추천된 후보를 검토하고, 외부 전문가 평가를 거쳐 결정한다. 후보 추천은 매년 1월 31일 마감한다. 후보 명단과 심사 과정은 원칙적으로 50년간 비공개다. 수상자는 메달과 증서, 상금 1200만 스웨덴크로나(약 16억 2000만원)를 받는다.
1901년 처음 시상한 이래 마틴 루터 킹 목사(1964년), 마더 테레사 수녀(1979년), 만델라 전 대통령(1993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2009년), 유니세프(UNICEF·1965년), 세계식량계획(WFP·2020년) 등이 역대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국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유일하게 수상했다. 지난해 수상자는 베네수엘라 민주화 운동을 이끈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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