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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남궁창성의 인문학산책] 윤지당, 조선 지성사 제1의 여성

‘추상 같은 그 광채여! / 해를 녹일 그 칼날이여! / 형체 없는 마음의 칼날은 / 그 예리함이 쇠라도 끊겠네 // 칼날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 백가지 사악함이 멈추네 // 네 위엄의 씩씩함이여! / 네 공력의 신통함이여! / 아! 빛난다.

[남궁창성의 인문학산책] 윤지당, 조선 지성사 제1의 여성

‘추상 같은 그 광채여! / 해를 녹일 그 칼날이여! / 형체 없는 마음의 칼날은 / 그 예리함이 쇠라도 끊겠네 // 칼날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 백가지 사악함이 멈추네 // 네 위엄의 씩씩함이여! / 네 공력의 신통함이여! / 아! 빛난다. 비수여 / 나를 여인이라 여기지 말라 // 네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힘써 / 숫돌에 새로 간 것처럼 하리라 // 내 잡념 모두 쓸어버리고 / 내 마음의 잡초를 베어 버리리 // 네 역적을 모두 물리치면 / 순 임금 같은 마음이 하늘 높이 뜨고 / 만세토록 태평하여 / 이 마음이 평화롭네.’

‘비수에 새기는 명문, 비검명(匕劒銘)’입니다.

▲ 원주시 단구동 임윤지당 선양관 앞에 서있는 선생의 시비.

이 글은 조선 500년 지성사에서 제1의 여성으로 손꼽히는 임윤지당(任允摯堂·1721~1793년)의 명문입니다. 비검, 즉 칼날은 결단력입니다. 윤지당의 정신수양 방법과 그 의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윤지당은 함흥판관을 지낸 임적(任適·1685~1728년)과 이조판서로 증직된 윤부(尹扶)의 딸 파평 윤씨(坡平 尹氏)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사간원 정언 임명주(任命周·1705~1757년), 성천부사 임성주(任聖周·1711~1788년), 청산현감 임정주(任靖周·1727~1796년)의 누이입니다.

1725년 판관으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함흥으로 갔다 1727년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이듬해 가장이 죽자 가족들은 1729년 임적이 생전에 삶의 근거지로 마련해 두었던 청주 옥화(玉華)라는 산골로 이사했습니다. 이 시절 윤지당은 오빠 임성주에게서 효경(孝經), 열녀전(烈女傳), 소학(小學)은 물론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등 유교 경전과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던 가족들은 8년 후 조상들의 선영이 있던 여주로 다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열아홉이 되던 1739년 윤지당은 명문가 자제인 신광유(申光裕·1722~1747년)와 결혼하며 원주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단란했던 신혼 생활도 잠시, 남편은 1747년 스물 여섯의 나이에 숨졌습니다. 윤지당은 졸지에 청상(靑孀)이 됐던 것입니다. 결혼 초기 어렵게 얻었던 아이를 잃은 뒤였습니다. 그래도 사대부 며느리로서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시댁 식구들도 극진히 보살폈습니다.

대사간이 되는 시동생 신광우(申光祐·1726~1798년)는 홀로 된 형수를 어머니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관직에 있을 때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집안 대소사를 의논했습니다.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흔이 넘어 조카 신재준(申在竣·1760∼1787)을 양자로 입양했지만 그도 스물 여덟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793년 윤지당은 원주 시댁에서 일흔 셋을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습니다.

사후 호저면 무장리 평산 신씨(平山 申氏) 선영에 잠들었습니다. 1796년 ‘윤지당유고(允摯堂遺稿)’가 친정 동생 임정주와 시동생 신광우에 의해 간행됐습니다.

유고에는 전기, 인물론, 발문, 논설, 잠언, 명문, 찬문, 제문, 경의와 함께 부록으로 언행론 등이 실려 있습니다.

▲ 윤지당유고

윤지당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아담하고 장중하며 한결 같았다. 헤프고 산만한 기색과 단정하지 못한 용모를 보인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는 아담하고 장중하며 사랑스럽고 경건하다고 했다. 처음 시집와서 사당을 배알할 때 하녀의 시중을 물리치고 손수 제기를 받들어 모셨다. 예의와 거동이 익숙하고 진퇴지절(進退之節)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동서가 출산할 때 사경을 헤맸는데 몸소 약과 음식을 조리하여 나흘 밤낮을 지성으로 간호했다. 일이 예법에 어긋나거나 재물이 떳떳하지 않은 것은 마치 더러운 물건을 보는 것처럼 하여서 결백(潔白)한 데가 있었다. 사람을 대하고 교제할 때에는 한결같이 화목(和睦)하고 너그럽게 했다. 남에게 베풀 때는 아끼거나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 그렇다고 분수(分數)에 지나치게 하는 법도 없었다.

언문으로 소식을 주고받는데 크고 작은 일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종이를 이어서 여러 폭을 만들고 작은 글씨로 문장을 지었는데 언제나 행간이 정연하고 반듯했다. 자획은 모두 정자체로 썼으며 한 자라도 수정하거나 한 점이라도 고쳐 쓴 것이 없었다.

둘째 오빠가 군수로 있을 때 양평을 찾았다. 조카들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했다. 하루는 “오늘 공부는 어떠했냐?”고 물었다. “날씨가 더워 고통을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부채질을 하냐?”고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답했다. 윤지당은 “정신을 집중해 책을 읽으면 가슴 속에서 자연히 서늘한 기운이 생긴다. 어찌 부채질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너희들이 아직도 공염불을 면치 못했구나”하고 지적했다.’

역사는 윤지당을 조선 500년 지성사에서 제1의 여성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윤지당은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는 교조적인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조선 사회에서 진보적인 여성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남자의 원리는 씩씩한 것이고 여자의 원리는 유순한 것이니 각기 그에 따른 법칙이 있다. 성녀(聖女) 태사(太似)와 성인(聖人) 문왕(文王)께서 하신 업적이 각기 달랐던 것은 서로 그 분수(分數)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같이 천성대로 최선을 다하셨던 것은 그 원리가 같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꾸어 놓았더라면 두 분이 또 거기에서 최선을 다하셨을 것이다. 그럼으로 부인으로 태어나서 태임(太任)과 태사의 도덕 실천을 자임하지 않으면 이는 자포자기한 사람이다.’

또 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합니다. “나는 비록 부인이지만 하늘에서 받은 성품은 애당초 나면서 (남성과) 차이가 없다. 부인으로 태어나 태임과 태사와 같은 성녀가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자포자기한 사람들이다.”

▲ 임윤지당 선양 사업을 펼치고 있는 이동희 원주예림회 회장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도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윤지당은 ‘대학’과 ‘중용’에 대해 해설한 ‘경의(經義)’를 집필했습니다. 이 글에는 주자(朱子)의 주(註)와 해석(解釋)이 있지만 윤지당은 주자의 해설에 의문을 품고 독자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주자 해석에 토를 달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파문당하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때 용기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윤지당의 학문적 자부심과 비판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심성론(心性論)의 경우 율곡(栗谷)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계승하고 퇴계(退溪)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부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윤지당은 심(心)과 성(性)의 불리성(不離性)을 강조했지만 같은 것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심성론은 심(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따라서 마음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역사 인식도 주체적입니다.

윤지당은 중국사에 등장하는 11명의 인물에 대해 평가했습니다. 일례로 대표적인 충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악비(岳飛)에 대해 신랄하고 대담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의 역사인물 비평은 여성의 평가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혹독하고 새로운 시각입니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도 비판했습니다. 사마광이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를 정통왕조로, 유비(劉備)가 세운 촉한(蜀漢)을 반란집단으로 기록했는데, 이는 정통(正統)을 문란시켰다는 이유입니다.

이같은 역사 인식은 조선후기 유학자들의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확고한 역사 인식과 논리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윤지당은 인(仁)과 의(義)를 중시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했습니다. 맹목적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구하는 패도정치(覇道政治)는 경멸했습니다. 도의와 명분만을 중시하는 정치는 사회 현실과 통치의 효율성을 간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윤지당은 참된 마음으로 인의를 행했던 요(堯), 순(舜), 탕(湯)으로 이어지는 이상정치를 갈구했던 것입니다.

윤지당 선생에 대한 동시대의 평가를 보겠습니다. 영조와 정조 집권기 형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역임한 이민보(李敏輔·1717~1799년)의 기록입니다.

“윤지당은 천부적인 식견을 타고 났다. 성리학과 인의(仁義)의 논의(論議)에서는 고금의 여성들 가운데 제1인자였다.”

▲ 제3회 임윤지당 서화대전에서 문인화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한 정지연 작가와 작품 ‘월화’

오늘날 임윤지당 선생을 선양하며 마음과 몸으로 따르는 후생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한국여성예림회 이동희(73) 원주시지회장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매년 임윤지당 헌다례와 임윤지당 서화대전을 개최해 선생의 진취적 기상과 정신을 지역 공동체와 우리 사회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는 2015년 임윤지당 선양관의 초대 관장을 맡으며 2007년부터 선배들이 해왔던 헌다례를 더욱더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또 2023년부터 임윤지당 서화대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지난 13일부터 18일까지 원주 남산골문화센터에서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시민들이 윤지당 선생을 만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서화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원주 흥양초교 6학년 유지원(13)양도 윤지당 선생을 존경한다고 전했습니다.

대상 한글서예 작품 ‘심성수련’을 보면 한 획 한 획 써내려 간 글씨에는 작은 손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과 섬세한 심성이 엿보입니다. 그는 방과후 수업에서 서예를 익혔습니다. 3년차 새내기이자 꿈나무입니다. 하지만 실력은 일취월장 뛰어나고 놀랍습니다. 지난 7월 제3회 청오 차상찬 서예공모전에서도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숨은 노력의 열매입니다.

그는 윤지당 선생을 아직 잘 모릅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와 함께 임윤지당 선양관을 찾으며 선생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더 알고 싶은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 제3회 임윤지당 서예대전에서 한글서예 부문 대상을 수상한 원주 흥양초교 유지원 양

문인화 ‘월화(月花)’를 출품해 최우수상을 받은 정지연(44) 작가는 작품에 윤지당 선생의 삶을 잘 투영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작가는 수묵채색으로 선생을 직접 그렸습니다. 관람객들이 윤지당이라는 인물과 이름을 한 번 더 기억할 수 있도록 초상화를 그렸다는게 작가의 설명입니다.

포인트는 달항아리와 매화입니다. 작고 검은색 달항아리는 당시 여성들이 직면했던 배움과 활동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하지만 작고 어두운 항아리에서 힘차게 뻗어나간 굵고 단단한 나무가지와 그 끝에서 터트린 붉은 매화는 윤지당 선생이 현실을 극복하고 성취한 결실을 표현합니다. 작가는 작품을 준비하며 선생을 만났고 앞으로 선생을 주위에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아닙니다. 미래를 설계하는 일입니다. 오늘을 살아내고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희망이 될 선배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270년 전 시대적 한계와 개인적 불행을 딛고 우뚝섰던 임윤지당 선생이 위로와 격려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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