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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남궁창성의 인문학 산책] 휴정의 빛과 그림자

‘한 나그네가 있어 바람과 구름으로 기운을 삼고, 강과 바다로 도량(度量)을 삼으며, 해와 달로 눈을 삼고, 봄과 가을로 호흡을 삼아 태고(太古)의 정수리를 디디고 서서 무궁한 경계를 둘러보다, 이 절에 이르러 그 사실을 적는다.’

[남궁창성의 인문학 산책] 휴정의 빛과 그림자

‘한 나그네가 있어 바람과 구름으로 기운을 삼고, 강과 바다로 도량(度量)을 삼으며, 해와 달로 눈을 삼고, 봄과 가을로 호흡을 삼아 태고(太古)의 정수리를 디디고 서서 무궁한 경계를 둘러보다, 이 절에 이르러 그 사실을 적는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04년)의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에 있는 ‘봉은사기(奉恩寺記)’다. 휴정이 전국 산천을 누비다 1555년(명종10년) 여름 봉은사을 찾아 감회를 적었다. 봉은사는 오늘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건재한 절집이다.

‘봉은사기’는 계속된다.

‘전각에 오르면 시원한 기운을 맛볼 수 있고 푸른 못에 다다르면 더위를 잊는다. 연꽃을 구경하면 향기가 코에 닿고 매화를 바라보면 달이 창에 든다.

한수(漢水)는 왼쪽에 있어 동서를 꿰었고 큰 길은 오른쪽에 있어 장안(長安)으로 통한다. 배를 묶고 말도 매어서 길손의 시끄러움은 날마다 끝이 없고 주인의 맞고 보냄도 끝이 없다. 남쪽 별실에서 자리를 걷는가 하면 동쪽 별실에서 자리를 편다. 음식상을 미처 거두기 전에 찻상이 벌어 지나니 아침에 만솥의 밥을 짓고 열흘 동안 백섬의 벼를 찧는다. <중략>

아아! 부귀란 사람들이 다 같이 좋아하는 것이면서 또한 다 같이 싫어하는 것이다. 빈천이란 사람들이 다 같이 싫어하는 것이면서 또한 다 같이 좋아하는 것이다. 이제 주인이 빈천한 몸으로서 부귀하다는 이름을 얻는 것은 이 봉은(奉恩) 때문이요, 시비가 없는 몸이면서 좋아하고 미워한다는 이름을 얻는 것도 또한 봉은 때문이다.

옛말에 ‘문채 있는 표범의 재앙은 가죽에 있다’고 했는데 지금 이 봉은도 주인의 가죽이다. 그러나 부귀니 빈천이니 옳고 그름과

좋아하고 미워하는 따위는 주인의 몸에 있어서는 마치 뜬구름이 허공에 있는 것과 같다.

아아! 주인의 이름을 들은 사람은 한갓 주인의 소리와 형상의 즐거움만 알고, 주인의 소리와 형상을 떠난 즐거움은 알지 못한다. 또 주인의 몸을 본 사람은 한갓 주인의 소리와 형상을 떠난 즐거움만 알고 주인의 소리와 형상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그 주인은 누구인가. 조계(曹溪) 벽운대사(碧雲大師) 소요자(逍遙子)다.

때는 황명(皇明) 가정(嘉靖) 삼십사년 을묘(乙卯) 여름이다.’

이 글은 470년 전 봉은사의 영화(榮華)를 보여준다. 휴정도 천하주유 중 잠시 이곳을 찾아 기(記)로 흔적을 남겼다.

▲ 2023년 봄 봉은사에서 마주 앉은 윤석열 대통령과 회주 자승 스님

휴정은 누구인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열두 살에 서울로 가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지리산에 갔을 때 불교를 만났다. 헛된 이름을 멀리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라는 스승의 권유를 받고 출가했다.

1552년 승과에 합격했다. 선종과 교종의 판사를 겸직했다고 한다. 1566년 선교 양종이 폐지됐다. 그 무렵 금강산에 들어가 수행했다고 한다. 그 뒤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에서 주석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휴정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간 선조를 찾아갔다. “승려 가운데 늙고 병들어 나설 수 없는 자들은 각자 있는 곳에서 수행하고 신령의 도움을 기원하게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소집해 종군하게 하려 합니다. 신(臣) 등은 군역을 지는 부류는 아니지만 임금의 은혜와 훈육을 입었는데 어찌 죽음을 아끼겠습니까? 목숨을 바쳐 충심을 다하겠습니다.”

의승군(義僧軍) 5000명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이듬해 선조가 환궁할 때도 호위했다. 휴정은 그 직후 나라가 내린 벼슬, 8도16종 선교도총섭을 그만두고 산으로 갔다. 선조35년, 1602년 조정은 그에게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긴 시호를 내렸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세수 85세, 법랍 67세로 입적했다. 조선의 이름난 중은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 휴정 서산대사

휴정을 바라보는 동시대의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묵호자(默好子) 유몽인(柳夢寅·1559~1623년)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남긴 기록이다.

‘휴정은 스스로 호를 청허도인(淸虛道人)이라 했는데 동국의 이름난 중이다. 명성은 높았지만 그 실질은 적었다. 거처에 먼 지방의 진귀한 물건으로, 냄새 나고 비린 것을 제외하고, 모두 즉시 이르렀다. 공양미로 쌓여 있는 것이 늘 300여 석이나 됐다. 설법을 듣는 중이 법당에 가득하고 절집에 넘쳐 하루에 300~400명이 됐다. 그 가운데 어리고 예쁜 아이를 택해 잠자리를 시중들게 했다.

한 광승(狂僧)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묻기를 청하오니 오탁육진(五濁六塵·세상의 다섯 가지 더러움과 중생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여섯 가지)이란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

휴정이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답했다.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선사께서 날마다 어린아이를 골라 천침(薦枕·첩이나 시녀 등이 잠자리에서 시중을 드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끼?”

휴정이 크게 성내고 여러 제자들에게 눈짓을 주어 매질하도록 했다. 광승은 숨이 끊어져 거꾸러졌고 휴정의 중들은 끌어다 내다 버렸다.

나이가 육십이 지나서도 늘 예쁜 여자아이를 골라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몸을 어루만지고 문지르게 하는 자가 하루에 2~3명이었다.

묘향산을 떠나지 않았으니 묘향산의 여러 중들이 대개 여색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다.

글에 능하다고 칭해졌으나 그 문장은 문리가 이어지지 않았으며 그 시에만 다소 볼 만 한 것이 있었다.’

역사 기록에는 특정 인물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사색당파가 극심했고, 유교와 불교가 불화했던 조선 사회도 마찬가지다. 유몽인의 휴정에 대한 평가도 예외가 아니다.

▲ 선조 35년 1602년 조정이 휴정에게 시호를 내린다는 교지

불교계를 대표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전이 한창입니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시국에 절집은 물론 속계에서도 존경할 만한 큰 어른이 교단을 이끌어 가길 기대합니다.

권문세가의 발길이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는 봉은사 얘기도 좀 더 하겠습니다.

2008년을 전후해 주지를 지낸 명진 스님(속명 한기수)이 지난 22일 서귀포 바다에서 입적했습니다. 오고 가고, 가고 오는 우주의 법칙이 물처럼 흘러가고 있습니다.

고인은 몇 년 전부터 바다에서 프리다이빙 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구조 당시에도 마스크, 스노클, 다이빙 수트 등의 장비를 착용했던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조계종 금강 스님은 “무산소 바다 20m를 말씀하시더니 기어코 바다에서 입적하셨다”고 애도했습니다.

저 또한 두 손을 모아 고인

의 명복을 빕니다. “

나무아미타불.”

남궁창성 원주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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