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본 모든 까마귀가 검었으니 내일 보게 될 까마귀도 마찬가지라는 주장은 성급한 믿음일 뿐이다. 아무리 많은 증거가 쌓여도 귀납의 방법으로는 어떤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결코 확증할 수 없다. 반증은 다르다.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주장은 흰 까마귀 딱 한 마리의 발견으로 쉽게 반증되기 때문이다. 귀납적인 성격을 가진 확증은 어렵지만 연역적인 성격을 가진 반증은 쉽고도 명확하다.
과학도 마찬가지여서 젊은 과학자가 학계에 이름을 널리 알리는 첩경이 바로 흰 까마귀다. 흰 까마귀가 확인되지 않은 것이 모여 과학을 이룬다. 과학은 ‘아직’ 반증되지 않은 잠정적인 진술의 모임이다.
반증의 확실성도 고민할 여지가 있다. 술 취한 내가 흰 까마귀를 봤다고 우긴다면 어떨까? 당신이라면 내 주장을 반증의 증거로 받아들여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기존의 이론을 딱 잘라 기각할까? 술 취해 백조를 까마귀로 잘못 본 것이 아닐까 고개를 갸웃할 뿐, 굳건한 기존 믿음을 한순간에 포기할 리 없다. 이처럼 진술의 반증이 쉽지 않은 이유는 여러 보조 가설이 암묵적으로 함께 딸려있기 때문이다. 깃털을 누가 염색하지 않아야 하며, 다 자란 성체여야 하고,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눈 나쁘지 않고 술 취하지 않은 사람이 관찰해야 한다는 등등, 여러 보조 가설을 만족해야 핵심 진술이 성립한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핵심 이론과 여러 보조 가설이 무리 지은 전체가 반증의 법정에 함께 출두한다. 명확한 반증의 증거에 맞닥뜨렸을 때 실제 반증되는 것이 핵심 이론이 아닐 수 있다. 보조 가설을 수정하는 방법으로 핵심 이론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술 취해 백조를 까마귀로 착각했을 뿐, 여전히 모든 까마귀는 검다.
수성과 천왕성의 불규칙한 궤도 운동에 관련된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천왕성의 궤도가 불규칙하다고 해서 뉴턴의 중력 이론을 기각한 것이 아니었다. ‘알려진 천체만을 고려’한 기존의 보조 가설을 ‘새로운 행성의 영향도 고려’하도록 수정해 해결했다. 핵심 이론인 뉴턴의 중력 법칙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보조 가설을 이용해 해왕성을 예측하고 발견할 수 있었다.
수성의 궤도 이상도 마찬가지로 미지의 행성 벌컨의 영향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뉴턴 중력 이론을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으로 업그레이드해 문제를 해결했다. 천왕성의 이상 궤도는 보조 가설의 수정으로, 수성의 이상 궤도는 핵심 이론의 교체로 해결됐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은 아이스큐브 중성미자 관측 실험을 제안하고 주도한 프란시스 할전에게 수여됐다. 다른 물질과 좀처럼 반응하지 않는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위해 남극의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필요했다. 1930년 중성미자의 존재를 처음 예측한 이가 물리학자 파울리다. 내부의 중성자 하나가 양성자로 바뀌면서 라듐 원자핵은 원자번호가 하나 늘어 같은 질량수를 가진 악티늄 원자핵이 된다. 이 과정에서 방출된 전자의 에너지는 뒤죽박죽 달라 에너지 보존 법칙을 위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실험 결과가 반증하는 것을 핵심 이론과 보조 가설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핵심 이론에 해당하는 것은 물리학의 금과옥조인 에너지 보존 법칙이고 관찰된 전자 말고 방출된 다른 입자는 없다는 것이 보조 가설에 해당한다. 파울리는 핵심 이론이 아닌 보조 가설을 수정했다. 관찰하기 어려운 어떤 유령입자가 방출됐으며 이 입자의 에너지도 고려하면 핵심 이론인 에너지 보존 법칙은 여전히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 보존 법칙에 대한 확신으로 중성미자의 존재를 처음 예측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반증이 가능한 것만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바늘 끝에는 딱 한 명의 천사가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 저 먼 외계 행성에 영국 찻주전자가 있다는 주장, 지옥의 부피는 지구의 12분의 1이라는 주장은 반증 불가능해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반증 가능한 여러 주장이 등장해 경쟁하고 이 중 많은 주장이 반증의 체에 걸러져 사라진다. 여러 번 체를 통과해 남은 과학의 알곡 안에도 여전히 쭉정이가 숨어 있을 것은 분명하다. 미래에 더 촘촘한 체가 등장해 알곡 대 쭉정이의 비율이 높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과학은 확실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반증의 시도를 버티고 살아남아 그나마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최선의 것이 과학이다. 과학은 반증으로 나아간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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