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균 ETRI 기업성장지원부장
한때 ‘노잼도시’로 불리던 대전이 이제는 빵의 성지로 바뀌었다. 반가운 변화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업의 기회를 찾아 청년이 모이고, 기술과 인재를 만나러 기업이 찾아오는 대전을 그려 본다. 대전이 쌓아온 과학기술 역량을 기업의 성장과 시민의 일자리로 잇는 일, 그 중심에 ‘지역 혁신창업’이 있다.
지난 15일 ETRI에서 열린 ‘지역 창업생태계 활성화 대토론회’에는 정부와 지자체, 대학과 출연연, 창업기업과 투자자가 자리를 함께 했다. 현장의 이야기는 하나로 모였다. 지역에서 시작한 도전이 어떻게 끝까지 성장할 수 있는가.
지역 창업은 기업 하나를 새로 만드는 일을 넘어, 지역이 스스로 성장동력을 만드는 과정이다. 창업기업이 자라 일자리를 만들고 청년이 정착하며, 성공의 경험과 자본이 다음 창업으로 이어지는 자생적 성장구조의 선순환이 필요하다. 오늘날 지역경제를 떠받치는 기업도 한때는 작은 창업기업이었다.
이 선순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주는 사례가 루센트블록이다. ETRI 연구원이 창업한 이 회사는 부동산을 작게 나눠 누구나 투자할 수 있게 하는 ‘조각투자’ 시장을 열었다. 기존 법에 이를 담을 그릇이 없었다. 2021년 금융위원회의 혁신금융서비스, 이른바 규제 샌드박스로 지정받아 서비스를 내놓았고, 규칙이 없는 영역에서 스스로 안전성과 시장성을 증명해 왔다. 출연연의 인재가 창업에 나섰고, 정부의 실험 제도 안에서 검증을 거쳐, 새로운 산업의 제도화를 이끌어낸 ‘지역 혁신창업의 교과서’다.
이 길은 우연이 아니라 설계된 것이었다. 2018년 말 제정된 ‘금융혁신지원 특별법’은 아직 법에 없는 서비스라도 조건을 붙여 실험을 허용하고, 실증 결과를 바탕으로 규제를 고치며, 실증을 마친 사업자가 정식 인·허가를 신청할 수 있게 하는 절차를 한 법 안에 담았다. 실증에 성공하면 제도화의 길을 열어주겠다는 약속이었고, 루센트블록은 그 약속을 믿고 뛰어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제도화의 문턱에서 길이 막혔다. 올해 2월 금융위원회는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대상으로 한국거래소 컨소시엄과 넥스트레이드 컨소시엄을 선정했고, 루센트블록은 탈락했다. 시장을 처음 열고 제도의 필요성을 증명한 기업이, 정작 제도가 생기자 그 시장 밖으로 밀려난 셈이다.
금융당국은 공정한 심사였다는 입장이고, 루센트블록은 결정을 뒤집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특별법이 실증을 마친 사업자에게 열어둔 인·허가 신청 절차에 따라 심사를 받을 기회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날 토론회 현장에서도 이 문제가 거듭 제기됐고, 국무총리는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절차의 공정성과 별개로, 이 사례가 다음 세대 창업자에게 보내는 신호를 무겁게 봐야 한다. 혁신의 위험은 스타트업이 지고 제도화의 열매는 자본과 규모를 갖춘 거대 기관이 가져간다면, 누가 먼저 위험을 지려 하겠는가. 규제 샌드박스가 새 시장을 대신 검증해 주는 시험장에 그친다면 제도의 취지도 흔들린다. 연구실을 나서려는 연구자, 지역에서 승부를 걸려는 청년에게 “끝까지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서는 안 된다. 지역 혁신창업의 대표 사례가 제도화 단계에서 멈추는 것은 한 기업의 좌절을 넘어 지역 혁신의 동력을 꺾는 일이다.
물론 샌드박스가 정식 인가를 보장할 수는 없다. 다만 창업기업은 어떤 요건과 절차를 거쳐야 사업을 이어갈 수 있는지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실증에서 쌓은 성과와 위험관리 역량을 평가에 제대로 반영하고, 부족한 요건은 보완할 길을 열어줘야 한다. 규모와 자본력만으로 줄을 세운다면 스타트업은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줄탁동시’라 했다. 지역 혁신창업은 창업자의 용기와 지역사회의 뒷받침, 그리고 혁신이 제도의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정부의 의지가 만날 때 자란다. 창업을 시작할 기회만큼 중요한 것은 끝까지 성장할 수 있는 경로다. 루센트블록의 다음 장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대전에서 창업을 꿈꾸는 다음 세대의 선택을 좌우할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