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휴 한국전력 대전세종충남본부장
1644만 명.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지금까지 웃고 울린 관객의 수다. 세상과 단절된 유배지에서 시들어가는 어린 왕 '이홍위'의 곁을 묵묵히 지킨 산골 촌장 '엄흥도'의 헌신과, 16세에 세상을 뜬 어린 왕을 지켜주지 못한 안타까움은 먹먹한 여운과 감동을 준다. '왕사남'은 팬데믹 이후 최고의 흥행작이자 한국영화 역대 흥행 2위라는 쾌거도 이뤘다.
단종의 애달픈 사연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여서 감독조차 설마 천만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사실 단종의 유배와 죽음은 100년 전부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1928년, 춘원 이광수가 쓴 소설 '단종애사'가 그 시작이다. 최근 재출판된 단종애사는 '왕사남'의 흥행에 힘입어, 고전문학 역사상 유래가 없는 전년 대비 80배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이토록 널리, 오랫동안 알려진 단종의 이야기가 어떻게 감독마저 어리둥절하게 할 정도로 인기를 끌 수 있었을까. 배우들의 열연과 감독의 뛰어난 연출이 첫째 비결이겠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디지털과 AI로 가득한 시대에 '근본적인 가치'에 대한 목마름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수양대군의 서슬퍼런 권력에 몸을 사릴 때, 삶의 의지를 잃어가던 단종의 곁을 벗으로서 묵묵히 지키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한 엄흥도에 열광하는 것. AI가 무엇이든지 생성하고 복제하는 시대에,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헌신과 사랑은 복제 불가능한 근본적 가치다. 이러한 목마름이 세대를 불문한 '왕사남 앓이' 신드롬으로 이어지고 있다.
단종의 버팀목이 되어 준 엄흥도의 변치 않는 지원과 헌신이 가진 '근본적인 가치'는 기술 혁신이 눈부시게 빨리 일어나는 오늘날의 산업계에서도 중요하다. 최근 세계 무대에서 웅비하고 있는 K-반도체는 국가의 미래 먹거리를 좌우할 핵심 기술로, 그 성과를 100% 발휘하기 위해서는 전력산업의 묵묵하고 변함없는 지원이 필요하다. 반도체뿐만 아니라 방산, 디스플레이, 조선 등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우리나라 주력 산업들은 예외없이 막대한 전기를 필요로 한다. K-산업을 묵묵히 지원해 온 전력산업은 근본적인 기초체력인 셈이다.
전력산업이 화려하게 주목받지는 못한다. 전력 인프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산골 촌장 엄흥도처럼 깊은 산속 험지를 몸소 개척하고, 변전소나 송전탑과 같이 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시설도 건설해 내야만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 첨단 산업의 화려한 결실에 환호할 때에도, 한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결실을 더 크게 피워낼 수 있도록 설비를 건설하고 운영한다.
한전은 글로벌 에너지 위기 상황마다 민생과 기업에 미치는 충격을 흡수하는 방파제 역할도 해 왔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천연가스와 석탄 요금이 급등했을 때, 전기요금 인상 요인 상당 부분을 감당하며 물가 인상을 완화하고 K-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번 중동 정세 악화로 인한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도 한전은 전기요금 인상요인을 최소화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충격을 완충하고자 고군분투 중이다. 뿐만 아니라, 전력그룹사와 협력하여 513GWh를 자체 절감하는 고강도 에너지 절약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LNG 약 8만t의 수입을 대체하는 양이다.
'왕사남'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눈가를 적신 뜨거운 눈물은, 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평범한 영웅들에 대한 위로이자 찬사였을 것이다. 글로벌 에너지 위기의 파고를 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소명을 다하며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현대판 '엄흥도'들의 헌신에 찬사를 보낸다.
신경휴 한국전력 대전세종충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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