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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性벽을 넘어 인간을 본다

한때 파격적인 실험으로 여겨졌던 ‘젠더프리 캐스팅’이 공연예술계의 새로운 문법으로 자리 잡는 양상이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특정 배역을 배우의 성별과 관계없이 맡기는 방식이다.

배우 문근영이 연극 ‘오펀스’에서 남성 주인공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고 있다. /뉴스1

한때 파격적인 실험으로 여겨졌던 ‘젠더프리 캐스팅’이 공연예술계의 새로운 문법으로 자리 잡는 양상이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특정 배역을 배우의 성별과 관계없이 맡기는 방식이다. 배역과 배우의 성별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감정과 서사에 집중하려는 시도가 연극과 뮤지컬, 창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이어지고 있다.

연극 ‘꽃의 비밀’은 이달 12일~11월 29일까지 서울 대학로 링크아트센터 벅스홀 무대에 오른다. 장진 감독의 대표 코미디인 이 작품은 이탈리아 북서부의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축구에 빠져 가정을 등한시하던 가부장적인 남편들이 사라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 네 명의 주부가 남편으로 변장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통해 웃음 속에 가부장적 사회와 전통적인 성 역할을 비튼다.

올해로 여섯 번째 시즌을 맞는 이 작품은 처음으로 젠더프리 캐스팅을 도입했다. 주부 역에 황석정, 유선, 박하선 등 여성 배우뿐 아니라 성지루, 정웅인, 정경훈, 강은빈, 임모윤 등 남성 배우들이 이름을 올렸다. 장 감독은 “작품을 쓴 지 10년이 지난 지금 ‘젠더프리’라는 가장 유쾌하고 자유로운 옷을 입고 무대 위에 구현됐다”며 “배우의 성별을 뛰어넘어 오직 코미디 본연의 재미와 인물의 매력으로 승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연극 ‘오펀스’가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다. 고아 청년 트릿 역에 문근영·정인지, 중년 갱스터 해럴드 역에 우현주·양소민, 동생 필립 역에 김주연·김단이가 캐스팅됐다. 1인극 ‘지킬앤하이드’도 남녀 배우 4명씩이 같은 배역을 번갈아 맡으며 지난달 23일까지 6개월간 공연을 이어갔다.

오는 15일 재공연에 들어가는 창작 뮤지컬 ‘아나키스트’도 기존에 남성 배역이었던 세 명의 주인공 역에 여성 배우를 함께 캐스팅했다.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혁명단을 결성한 세 청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배우의 성별보다 인물의 신념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12월 6일까지 예스24아트원 1관 무대에 오른다.

창극 ‘살로메’의 최예림 / 제공 시화사

창극 살로메의 김준수/ 제공 마포문화재단

기존에 남성 배우가 여성 배역을 맡았던 작품에 여성 배우를 더한 사례도 있다. 창극 ‘살로메’에서는 초연 당시 국악계 스타 김준수가 맡아 화제가 됐던 살로메 역에 지난해부터 최예림이 함께하고 있다. 김시화 연출은 “두 배우가 보여주는 살로메는 결이 크게 다르다”며 “김준수의 살로메는 위험하고 자유로운 여성을 연기하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매력이 있고, 최예림의 살로메는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 점점 깊이 빠져드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살로메’는 이달 12일까지 부산, 고양, 대구, 창원 등에서 공연된다.

국립창극단이 11월 선보이는 신작 창극 ‘오이디푸스’는 주인공 오이디푸스를 여성으로 설정했다. 오랫동안 남성 영웅의 비극으로 읽혀온 작품을 여성 배우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풀어낸다.

공연가에서 잇따라 젠더프리 캐스팅을 도입하는 배경에는 배우의 성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인물을 바라보게 한다는 판단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기존 희곡에선 남성 주인공이 주류인 만큼, 여성 배우에게 새로운 역할과 해석의 기회를 열어주는 효과도 있다. 전지니 평론가는 “미투 운동 이후 공연계에서도 기존 젠더 구도를 성찰하려는 시도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이 이뤄졌다”며 “성별이 달라질 경우 익숙한 인물과 서사를 일정한 거리에서 다시 바라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마케팅 전략 중 하나라는 해석도 있지만, 무엇보다 관객들의 호응이 좋다는 점은 이 같은 트렌드 확산의 배경이다. 남지수 연극평론가는 “고정된 성 역할에 거부감을 느끼는 연극 관객의 취향에 소구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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