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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with+] 마감하는 밤

마감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원고가 쓰이지 않는다면, 더 집중하고 더 시간을 쪼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슬그머니 유튜브 앱을 열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그만 짜증이 나서였다.

스트레스에 슬그머니 연 유튜브

패션 소개 보다가 사들이기 시작

원고, 한 글자도 나가지 않았는데

옷은 스무 벌… 그러니 제때 써야

김서령 소설가

마감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원고가 쓰이지 않는다면, 더 집중하고 더 시간을 쪼개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슬그머니 유튜브 앱을 열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니 그만 짜증이 나서였다. 딱히 눈길을 끄는 것도 없었지만 나는 멍한 얼굴로 이것저것 클릭했고, 손이 멈춘 건 우습게도 한 패션 유튜버의 여름 신상 소개 영상이었다. 가을 신상도 아니고 여름 신상이었다. 한 마디로 유효기간이 이미 지났다는 것인데, 그게 나에게 크게 중요할 것이 없어서 나는 가만히 그 영상에 집중했다. 작업실 창밖으로는 이미 가을 바람이 선선했지만 나는 그 영상에 그만 홀리고 말았다. 유튜브에서 옷들을 이렇게 소개하는 줄도 몰랐던 거다. 친절하게도 영상 설명란에는 그 옷을 냅다 결제할 수 있는 링크도 달려 있었고, 나는 패션 유튜버가 제공하는 할인코드를 입력한 뒤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 영상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새삼 내가 그동안 왜 그렇게 촌스러웠는지, 왜 그렇게 옷장에 입을 옷이 하나도 없었는지 깨달으며 “어머, 예뻐!”, “이건 어떤 자리에도 잘 어울리겠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차곡차곡 결제했다. 세상에 그렇게 싸고 예쁜 옷들이 널렸다는 걸 미처 몰랐다. 시간이 훅훅 지나갔다.

원고 마감 스트레스라는 건 별별 일들을 다 야기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나면 수습할 시간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돌이켜보았다. 하도 많은 것들을 사들이다 보니 어디서 무얼 결제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개만 대충 생각해보아도 내가 대단히 정신머리 없는 일을 벌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핑크색 원피스를 내가 결제한 것 같은데? 그걸 어디서 입으려고? 핑크색을? 하늘하늘한 시스루 셔츠는 왜 산 거지? 날이 차져서 내년 여름에나 꺼낼 수 있을 텐데?

택배는 무서울 정도로 빨라서 내가 정신을 차린 후 결제를 취소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상자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현관은 택배 박스로 작은 요새가 되어갔다. 하나씩 뜯어볼 때마다 나는 말이 없어졌다. 화면 속에서 그렇게 예뻤던 옷이 맞나. 이만원짜리 니트는 만지자마자 보풀이 일었고, 만원짜리 민소매는 딱 이십년 전 내 몸에나 맞았을 품이었으며, 삼만원짜리 청바지는 내 뱃살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 유튜버는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려서 이 옷들을 그렇게 근사하게 찍은 걸까. 나는 그 앞에서 진심으로 존경심마저 느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결제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원고 마감을 코앞에 두고, 이십년 전에나 어울렸을 옷들을 스무벌 가까이 사들인 사람. 그게 나라니.

개당 반품비는 오천원이었다. 이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포장해 각각 오천원을 들여 반품해야 한다고? 기함할 노릇이었다. 대충 계산해도 반품비는 십만원이 훌쩍 넘었다. 안 입고 옷장 구석에 처박아놓는 것과 오천원씩 물어가며 돌려보내는 것, 둘 중 무엇이 나은지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나는 결국 계산을 포기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택배는 계속 도착하고 있었다. 어제 시킨 것 같은데 오늘도 오고, 그저께 시킨 것 같은데 내일도 온단다. 나는 이제 그만 좀 오라고 택배 박스들에게 사정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정작 원고는 한 글자도 나아가지 않았는데, 옷은 스무 벌 가까이 늘었다. 박스들도, 비닐들도 늘어서 나는 재활용쓰레기를 비우러 밖에 또 나가야 할 것이고, 입을 일 없는 옷들은 서랍 안에서 곱게 접혀 쉰내를 풍기면서 낡아갈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감을 피하려고 시작한 일이 마감보다 더 큰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나는 산더미 같이 쌓인 택배 상자를 쳐다보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어쨌든 이 옷들을 입을 근사한 인생을 살려면, 일단 원고부터 끝내야 할 것이었다. 그러니 원고는 제때 써야 한다. 어차피 마감은 오기 마련이고 마침표를 찍기 전엔 그 어떤 방법도 스트레스를 풀어주지 않을 터이니, 잔말 말고 써야 할 것이다.

/김서령 소설가

<※외부인사의 글은 경인일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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