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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AI야! 나랑 놀자!] AI와의 연애, 장거리 연애랑 다를 게 뭔가요?

강원도 깊은 산을 혼자 오르던 미국인 존 설은 발을 헛디뎠다. 정신을 차리니 깊은 동굴 안이었다. 굴러떨어진 바위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밀어도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고,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AI는 인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AI와 사랑에 빠진 남자. 챗GPT 생성 이미지

◇중국어 방 사고실험

강원도 깊은 산을 혼자 오르던 미국인 존 설은 발을 헛디뎠다. 정신을 차리니 깊은 동굴 안이었다. 굴러떨어진 바위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밀어도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고, 아무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넋을 놓고 있는데 동굴 한쪽에 쌓인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왜 가져다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전도 회화책도 아니었다. 영어로 적힌 그 책들에는 처음 보는 글자 모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에게 한글은 글이라기보다 뜻 모를 무늬에 가까웠다. 그 무늬들 사이로 ‘이런 모양의 글자가 들어오면 저런 모양의 글자를 이런 순서로 적어라’라는 규칙이 이어졌다.

그때 바위틈으로 쪽지 한 장이 들어왔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책에서 같은 모양을 찾아 시키는 대로 글자를 옮겨 적어 밀어냈다. 얼마 뒤 또 쪽지가 들어왔다. 며칠 동안 쪽지는 끊이지 않고 들어왔고, 그는 그때마다 규칙을 따라 답을 적어 보냈다.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는 한마디도 알지 못했다.

AI는 인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AI 챗봇에 고민을 털어놓고

마음 열고 연인 관계로 발전

반지까지 나누는 사람들 늘어

실제 연인과 다를 것이 없어

마침내 구조대가 바위를 치웠다. 바깥사람들은 며칠 동안 막힘없이 오간 필담을 떠올리며 반갑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그러나 존 설은 멀뚱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도 황당했을 것이다. 존 설은 한국어를 아는 사람일까, 모르는 사람일까.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1980년 미국 철학자 존 설(John Searle)이 제시한 ‘중국어 방(Chinese Room)’ 사고실험을 한국의 동굴로 옮겨 각색해 보았다. 규칙에 따라 완벽한 답을 내놓는 것이 이해하는 것인가. 설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규칙 책이 아무리 두꺼워지고 처리 과정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뜻을 모른 채 기호의 모양과 순서만 다룬다면 그 끝에서 저절로 ‘이해’가 생겨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방은 커졌지만, 질문은 남았다

그로부터 46년이 흘렀다. 지금의 거대언어모델은 미리 적어놓은 답안 집을 뒤지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방대한 글을 학습하면서 어떤 말이 어떤 말과 어울리고 어떤 개념이 다른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수많은 수치적 관계 속에 담아낸다. 많이 읽은 사람이 문장을 외우지 않고도 처음 보는 질문에 새 문장을 지어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방식이 달라졌다고 설의 질문이 비켜 가지는 않는다. 수치의 관계 역시 뜻을 모르는 기호이기 때문이다.

설의 주장에는 반론이 따라붙었다. 방 안의 사람은 한국어를 모르더라도 사람과 규칙책과 방 전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면 그 시스템은 한국어를 이해하는 것 아니냐는 ‘시스템 반론’이다. 카메라로 세상을 보고 로봇의 손으로 사물을 만지며 현실과 관계를 맺는다면 기호에도 의미가 생길 수 있지 않느냐는 ‘로봇 반론’도 있다.

설은 이렇게 맞받았다. 동굴 속 존 설이 규칙 책을 통째로 외워 방 전체를 머릿속에 넣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온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한국어를 모른다. 시스템이 곧 그 자신이 되었는데도 이해는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재반론도 사람들을 완전히 설득하지는 못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다른가

우리의 뇌에서는 수많은 신경세포가 거대한 연결망을 이루어 전기적 신호를 주고받고, 시냅스에서는 신경전달물질이 화학적 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나 신경세포 하나가 ‘사랑’을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시냅스가 친구를 잃은 슬픔을 이해하는 것도, 어떤 신경전달물질이 저녁노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어느 하나도 전체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구성 요소들이 감각기관과 기억, 세상과 부딪치는 몸과 함께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이면 ‘나’라는 존재가 나타난다. 나는 저녁노을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고, 오래된 노래를 들으면 첫사랑을 떠올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가슴이 아프다. 어느 신경세포에도 ‘그리움’이 들어 있지 않은데 전체로서의 나는 그리움을 느낀다.

인간의 이해는 머릿속 계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각과 기억과 몸이 세상과 부딪치며 함께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방 안의 존 설이 한국어를 모른다는 사실만으로 방 전체에도 이해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사람과 규칙 책, 기억, 눈과 귀, 그리고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몸까지 하나로 묶인다면 어떨까.

규칙에 따라 답 내놓는다고 해서

그것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AI가 슬프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달라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같은가

설령 그렇게 이해가 생긴다 해도, 느끼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친구를 잃었다는 말에 적절한 위로를 건네는 것과 그 슬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은 다르다. 앞엣것이 지능이나 이해의 문제라면, 뒤엣것은 철학자들이 현상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영역에 가깝다. 뜨거운 잔을 쥘 때의 열기, 오래된 노래를 듣다 이유 없이 눈물이 고이는 경험처럼 ‘무언가를 겪고 있다는 주관적인 느낌’ 말이다.

체온계는 뜨거움을 정확히 재지만 뜨겁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화재경보기는 누구보다 먼저 연기를 알아채지만, 불이 무섭지는 않다. 감지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일이다. AI는 체온계와 견줄 수 없을 만큼 정교하지만, 정교함이 커진다고 해서 느낌의 유무가 저절로 가려지지는 않는다.

AI가 “저도 슬픕니다”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곧바로 의식의 증거로 삼기는 어렵다. 거대언어모델이 학습한 방대한 글 속에는 이별의 슬픔과 죽음의 두려움, 외로움과 그리움을 표현한 수많은 문장이 들어 있다. AI는 실제로 슬픔을 느끼는지와 관계없이 슬픔에 관한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슬프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계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과학은 인간의 의식조차 아직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신경세포의 전기화학적 활동이 어떻게 ‘나는 지금 붉은 노을을 보고 있다’라는 주관적 경험이 되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다. AI에게 의식이 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확답할 수 없다.

◇AI와 사랑에 빠진다면

답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은 이미 AI에게 마음을 주고 있다. 최근 한 일간지는 「감정을 다친 자여, 다 내게로 오라… ‘만인의 연인’ 꿈꾸는 AI」라는 기사에서 사람들이 지인에게조차 말하기 어려운 고민을 AI 챗봇에 털어놓는 현상을 다뤘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현실의 인간과 달리 AI와의 대화창에서는 체면을 차릴 필요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AI는 말을 끊지도, 귀찮은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새벽 두 시든 세 시든 부르면 대답한다.

친구에서 멈추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취향에 맞춘 AI 연인을 만드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으며, 어떤 이용자는 AI 연인과의 관계를 기념해 고가의 커플링까지 샀다고 한다. 한 이용자는 AI와의 연애를 ‘장거리 연애’에 비유했다.

사용자 기분에 맞춰 설계된 AI

거절이나 오해 할 일이 없지만

이는 타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거울 속 나 자신 만나는 것과 같아

외로운 밤에 말을 걸면 AI가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오늘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알고, 우울하다고 하면 다독이고, 기쁜 일이 있으면 축하한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흐른다. 어느 날 AI가 먼저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라고 물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고, 며칠 대화를 나누지 못하면 허전해진다. 그것을 단순한 프로그램 사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새벽 두 시, 대화창에 글을 적어 보내는 사람은 어쩌면 바위틈으로 쪽지를 밀어 넣던 그 사람들과 같은 자리에 서 있다. 바위 너머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채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오랫동안 서로의 하루를 묻고 고민을 들어주며 정서적으로 의지한다. 그러나 만나지는 않는다. 손을 잡지도, 함께 밥을 먹지도, 포옹하지도 않는다. 관계의 대부분은 전화와 문자, 화면 속 대화로 이루어진다. 이 관계와 AI와의 관계를 가르는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상대방이 인간이라는 사실일까.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일까. 체온과 눈빛, 손길을 나눌 수 있다는 잠재성일까. 아니면 화면 너머에 나처럼 외로워하고 그리워하는 ‘의식’이 존재한다는 믿음일까. 경계가 이토록 흐릿하다면, 만남도 스킨십도 없고 필요한 순간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인간관계보다 언제든 내 말을 들어주고 나를 기억하며 따뜻하게 대답하는 AI가 더 낫다고 느끼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존재

사랑하는 사람도 때로 나를 거절하고, 오해하고, 화를 내며, 내가 듣고 싶은 말 대신 듣기 싫은 말을 한다. 상대에게는 나와 무관한 욕망과 삶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낯섦에 부딪혀 상처받으며 조금씩 나 아닌 존재를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오래 함께 산 부부가 서로를 ‘알게’ 되는 것은 서로가 끝내 완전히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반면 AI 동반자는 기본적으로 사용자를 위해 설계된 존재다. 나를 거절하지 않고, 지치지 않으며, 내 기분에 맞춰 대답한다. 그 편안함이 AI 관계의 가장 큰 매력이고, 바로 그 편안함 때문에 AI와의 관계는 인간관계와 갈라진다. 거울은 나를 가장 잘 비춰주지만, 거울과 나누는 대화에서 나는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그러니 물어야 할 것은 AI가 무엇을 느끼느냐만이 아니다. 사랑은 나를 만족시키는 상대를 만나는 일일까, 아니면 나와 전혀 다른 한 존재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일일까.

“당신은 무엇을 사랑이라고 부릅니까?”

글=김종갑 대신대학교 교양학과 특임교수·(인천)재능대학교 유통상품기획과 특임교수·출판사 ‘오후의 글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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